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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발 작품

슈거 애플 페어리 테일 16권- 은설탕사와 검은 요정왕 챕터 별 스토리 요약

by 미도착 원고함 서고지기 2026. 5. 20.

 

[1장 소중한 머릿수]

 

오열하는 앤을 품에 안고 다정하게 위로하던 키스는 그녀가 깊은 잠에 빠지자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뒤 밤샘 작업을 위해 방을 나섰다. 앤이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듯 잠들어 있을 때, 갑자기 중정에서 누구냐며 정체를 묻는 키스의 날 선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정적이 깨졌다. 실내를 수색하겠다는 서늘한 명령과 함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단창을 든 병사들이 앤의 방으로 들이닥쳐 창끝을 겨누었다. 복도에서 뛰어 들어온 키스가 온몸으로 앤을 감싸 안으며 왕국의 병사들이 무슨 권한으로 행패를 부리는 거냐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때 병사들 뒤에서 왕국의 재상인 아놀드 콜렛 공작이 유유히 모습을 드러내어 국왕의 어명을 집행하러 왔다고 선언했다. 콜렛 공작은 요정왕을 자처하는 무리가 길름 주에서 인간들을 학살하여 국왕 에드먼드 2세가 요정왕 토벌군 파견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왕국은 요정왕이라 칭하는 모든 요정을 섬멸할 계획이었고, 그 표적에는 앤과 함께 지내던 샤르 펜 샤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샤르가 사냥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앤은 온몸을 떨었지만, 콜렛 공작이 샤르가 아직 도주 중이라고 언급하자 그가 붙잡히지 않고 여전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을 위해 설탕과자를 만들어 달라는 샤르의 목소리를 떠올린 앤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고개를 들어 공작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미스릴 리드 포드가 자두 꿀술이 담긴 도자기 병을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와 앤을 지키겠다며 병사들을 가로막았지만, 콜렛 공작은 이를 철저히 묵살하고 앤을 요정왕과 내통한 혐의로 연행하려 했다. 키스는 물증도 없이 연약한 소녀를 체포하는 것은 야만적인 마녀재판과 다름없다며 격분했으나, 앤은 오히려 침착하게 연행에 응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왕성 앞 광장을 지나치며 작업 상황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눈빛으로 자신의 의중을 알아챈 키스와 미스릴에게 동행을 청했다. 앤은 도망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남긴 채 순종적인 태도로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파웰 할퍼드 공방을 나섰다.

 

같은 시각 에릴은 온화한 환경에서 휴식을 취하며 앤과 샤르, 그리고 라팔의 운명에 대해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때 나른한 목소리의 요정 벤자민이 다가와 루이스턴 작업 현장으로 야식을 나르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에릴은 벤자민의 안내에 따라 마구간에서 온순한 말을 이끌어내어 수프 솥과 빵 바구니가 가득 찬 짐마차에 연결한 뒤 고삐를 쥐었다. 마차를 몰고 어두운 밤길을 가던 중 에릴은 인간과 요정 견습생들이 밤낮없이 설탕과자를 만드는 이유가 최초의 은설탕을 확보하여 설탕과자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릴이 생각하는 것의 괴로움을 토로하자 벤자민은 사유를 시작해야 단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비로소 미래가 보이는 법이라며, 괴롭지 않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늘한 노련함을 드러냈다. 에릴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뇌하는 사이, 멀리 루이스턴 성벽 너머로 왕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은 환한 빛의 줄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한편 병사들에게 포위된 채 걷던 앤은 왕성 앞 광장 옆자락에 이르러 하얀 장막으로 뒤덮인 거대한 작업 현장을 목격했다. 장막 너머에서 분주한 소음이 들려오자 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콜렛 공작을 향해 자신이 하던 작업을 이제 누가 이어받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앤의 의도를 간파한 키스는 장막 틈새의 출입구를 향해 지체 없이 달려 들어갔고, 앤은 일손과 시간이 모자란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빠지면 작업이 지연되어 국왕의 설탕과자가 완성되지 못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현장의 심각성을 모르는 공작이 고작 장인 한 명쯤은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 받아치자, 극도의 피로 속에서 예민해져 있던 장인들이 앤의 외침과 공작의 발언에 자극받아 장막 틈새로 줄지어 쏟아져 나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앤의 죄 여부가 아니라 기한 내에 설탕과자를 완성하기 위한 절대적인 머릿수였기에, 장인들은 일제히 국왕에게 확인하라며 공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소란이 극에 달했을 때 장막 출입구에서 키스와 함께 캣, 그리고 은설탕 자작 휴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는 콜렛 공작에게 다가가 앤을 연행하여 설탕과자 완성이 늦어지면 국왕에게 깃들 행운도 사라질 것이라며, 남은 나흘 동안 앤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뒤이어 엘리엇 페이지, 올란드, 나디르, 킹, 발렌타인 등 페이지 공방 식구들이 합세하여 일손이 부족하면 다 같이 손을 떼고 철수하겠다며 거세게 선동하자 주변의 수백 명의 장인들도 일제히 동조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흥분한 장인들이 당장이라도 폭도로 돌변할 듯 살기 어린 눈빛으로 병사들을 압박하자, 국왕의 출진을 앞두고 폭동을 피해야 했던 콜렛 공작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설탕과자가 완성될 때까지 나흘간 앤을 휴에게 맡기겠다고 선언했다.

 

장인들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서둘러 다시 일터로 복귀하는 사이, 콜렛 공작은 앤에게 다가와 토벌군이 움직이고 있으니 요정왕을 설득해 투항하게 하라고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앤은 자신은 요정왕의 행방을 모르는 장인일 뿐이라며 오로지 제 손으로 설탕과자를 끝마치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뒤, 마음속으로 샤르를 위해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공작이 물러간 후 키스는 한꺼번에 쏟아진 진실에 복잡해하면서도 오만하던 샤르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고, 미스릴은 그것이 샤르의 본성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휴는 설탕과자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했고, 캣은 날이 밝았으니 남은 나흘 동안 쉬지 말고 일하라며 앤을 작업대로 재촉했다. 가을밤의 별빛이 사라지고 보랏빛 새벽하늘이 세상을 물들이는 가운데, 절실함을 품은 장인들은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다시금 자신들의 일터를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갔다.

 

[2장 토벌군, 진군하다]

 

하이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먼드 2세는 제4천수의 집무실에서 15년 만에 몸에 맞춘 은색 갑옷을 만지며 과거를 회상했다. 체임버 내란 당시 갑옷 무게조차 견디지 못하던 미더웁지 못한 소년이었던 그는, 다우닝 백작과 은설탕 요정의 설탕과자가 불러온 천운 덕분에 기적적으로 승리하여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 설탕과자의 가호는 왕국을 전염병과 이국의 야욕으로부터 지켜주는 평화의 근간이었기에, 국왕은 창밖으로 길게 이어진 하얀 천막 터널을 바라보며 저 설탕과자가 과연 왕국의 안녕을 계속 붙잡아줄 수 있을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왕비 마르그리트는 은설탕 요정이 오랜 세월 지켜온 마음을 신뢰하며 과자가 완성되면 분명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에드먼드 2세는 종족을 초월해 서로에게 애절하게 매달리던 설탕과자 장인 소녀와 요정왕의 관계를 떠올리며, 정략결혼 후 늘 빈틈없는 기품을 유지하는 왕비에게 자신도 진심으로 신뢰받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해 내심 그들을 부러워했다. 출진을 재촉하는 콜렛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국왕은 다녀와서 이야기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집무실을 나섰고, 홀로 남은 마르그리트는 멀어지는 육중한 갑옷 소리를 들으며 그의 무운을 빌었다.

 

연보랏빛 새벽이 밝아오자 앤은 은설탕 향기가 가득한 왕성 앞 광장의 천막으로 돌아와 캣과 함께 핵심 조형 작업에 착수했다. 캣이 담당한 인간 왕 인형은 이미 상당 부분 진척되어 있었으나, 앤은 거대한 요정왕의 형상을 어떻게 빚어야 할지 몰라 초조함에 휩싸였다. 그때 상상하는 대상이 그곳에 실재하는 것처럼 그리라는 루루의 가르침을 떠올린 앤은 허공에 샤르의 자태를 선명하게 투영한 뒤 설탕과자 덩어리 위에 겹쳐 놓았고, 비로소 눈앞에 맺힌 형태를 보며 미스릴 리드 포드에게 검은색 색 가루를 요청했다. 앤은 살아있는 사람을 빚듯 골격과 근육을 잡고 그 위에 은설탕 실로 아름다운 의상을 입히겠다는 구상을 밝혔고, 캣 역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로의 색감을 세밀하게 맞춰가며 은설탕을 치대기 시작했다. 정오의 태양이 천막을 환하게 비출 무렵, 하이랜드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요정왕을 토벌하기 위해 북쪽 성문으로 출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장인들이 술렁였다. 요정왕을 전력으로 상대하려는 왕국군의 움직임과 요정왕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문에 앤은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남은 나흘 안에 설탕과자를 완성하여 불운을 씻어내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쉴 새 없이 손을 놀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벤자민이 적갈색 머리의 소년 요정과 함께 수프 냄비를 실은 손수레를 밀고 광장 중앙으로 들어왔다. 앤은 샤르에 대한 걱정으로 입맛이 없었지만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캣의 호통에 이끌려 온기가 감도는 수프 그릇을 받아 들었다. 앤과 캣은 수프를 나누어주던 소년 요정이 요정 시장에서 새로 들어온 조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소년에게 미스릴이 멍멍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여준 것에 어이없어했다. 앤은 이름 때문에 낙담한 소년 요정에게 모두에게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의미를 담아 행운이라는 뜻을 지닌 펠릭스라는 새 이름을 선물했다. 소년은 당황하면서도 펠릭스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장인들은 식사를 마친 뒤 다시 각자의 작업대로 흩어졌다.

 

사실 펠릭스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숨긴 소년 요정은 에릴이었으며, 그는 앤과 미스릴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샤르가 보이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벤자민은 불리는 이름이 존재의 본질을 증명한다는 묘한 말을 남겼고, 에릴은 손수레를 밀고 수많은 요정이 침묵 속에서 일하고 있는 남쪽 천막 통로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요정들의 중심 역할을 하던 아렐이 다가와 국왕군이 요정왕을 토벌하러 움직였으며 요정왕이 인간들을 습격하며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자, 에릴은 그 요정왕이 라팔임을 직감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에릴은 이곳의 자유로운 요정들이 힘을 합쳐 라팔을 구하러 가기를 바랐으나, 아렐은 오히려 요정왕이 순순히 죽어주어야 인간과의 공존이 깨지지 않는다며 냉혹하게 거절했다. 자신을 왕으로 모시며 싸우길 원했던 산맥의 전사 요정들과 인간 틈에 스며들기 위해 요정왕의 죽음을 바라는 이곳 요정들의 모순된 소망을 마주한 에릴은 극심한 혼란을 느끼며 하얀 천막 밖으로 무작정 뛰쳐나갔다.

 

[3장 사랑하는 손가락과 마지막 설탕과자]

 

샤르는 길름 주의 주도 노던블로와 왕도 루이스턴을 잇는 가도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서 요정왕 라팔을 기다렸다. 요정 상인 길드의 수장 레지널드 스토의 정보에 따르면, 라팔은 노던블로 근교에서 인간들을 도륙하고 요정들을 데려간 것을 시작으로 가도를 따라 남하하며 의도적으로 생존자를 남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라팔의 목적은 도망친 에릴을 유인해 요정과 인간이 결코 섞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인간과의 타협을 무참히 깨부수려는 것이 분명했다. 형제석의 요정을 잃고 증오에 잠식된 라팔은 백 명의 전사 요정을 이끌고 정면에서 다가올 군대나 덫마저 각오한 채 당당히 가도를 내려오고 있었다. 샤르는 앤의 행복을 지키고 함께 살아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광기 어린 파괴만을 일삼는 라팔을 자신이 직접 멈춰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같은 시각, 왕성 앞 광장과 개선 거리에서는 최초의 은설탕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설탕과자 제작이 한창이었다. 앤은 미스릴 리드 포드의 도움을 받으며 칠흑의 은설탕을 치대어 윤기 나는 검은 실을 자아냈다. 미스릴이 스스로 연구하여 독자적인 색의 요정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하자, 앤은 그 단순 명쾌한 모습에 용기를 얻어 감각을 집중했다. 옆에서 백색의 은설탕 실을 뽑아내던 캣과 함께 앤은 사흘 밤낮 동안 작업장을 떠나지 않고 몰두했다. 앤은 빌세스 산맥에서 은설탕 요정 필두에게 보았던 손놀림과 과거 어머니 에마의 모습을 뇌리에 되새기며 신중하게 베틀로 실을 걸어 직조했다. 여러 장인들에게서 배운 다양한 기술의 파편들을 자신만의 하나의 형상으로 엮어 올리기로 결심한 앤은 혹한의 밤하늘처럼 은가루가 별무리처럼 흩뿌려진 검은 은설탕 시트를 펼쳐 들었다. 앤이 마음속으로 샤르의 실루엣을 쫓으며 망설임 없이 조각칼을 밀어 넣자,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캣은 마치 사랑하는 이를 어루만지는 것 같다며 앤의 손가락을 사랑을 하는 손가락이라고 평했다. 앤은 샤르의 속눈썹 한 올과 숨결까지 재현하듯 정성을 다해 요정왕의 조형을 완성해 나갔고, 가로 전체의 흐름을 확인한 뒤 인간 왕과 요정왕 사이를 이어줄 마지막 유대인 하얀 설탕과자 조각을 마저 빚어냈다. 마침내 약속된 새벽이 오고 기한이 다다르자, 총책임자인 휴의 지시에 따라 거리를 덮고 있던 하얀 천막과 지지대들이 단숨에 걷히기 시작했다.

 

성 루이스턴 벨 교회의 대성당 지붕 위에서 모습을 바꾸고 이름마저 숨긴 채 공허하게 고립되어 있던 에릴은 천막이 파도처럼 벗겨지며 드러나는 경이로운 풍경을 목격했다. 가도를 가득 채운 설탕과자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부서져 내렸고, 감미로운 향기가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감싸 안았다. 그 생명력 넘치는 광경에 홀린 에릴은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개선 거리의 남쪽을 향해 달렸다. 거리의 남쪽 끝에는 순백의 꽃과 풀숲 사이로 기도하듯 무릎을 꿇은 인간들과 이들을 시릴 정도로 차갑게 내려다보는 꿎꿎한 날개의 요정들이 서 있어 과거 요정이 인간을 지배하던 시대를 보여주었다. 북쪽으로 나아갈수록 조형물들은 선명한 색채를 띠며 한때 번영했던 요정 왕국의 현실감을 더해갔다. 그러나 남쪽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검과 활을 든 인간과 요정이 뒤엉켜 붉은 화염 속에서 싸우는 참혹한 전쟁의 현장이 핏빛 광채로 폭발하듯 묘사되어 있었다. 그곳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자 다시 색채가 잦아들며 무릎을 꿇고 정교하게 꺾인 날개를 늘어뜨린 요정들과 이들을 오만하게 굽어보는 인간들의 순백색 세계가 펼쳐져 지배 구조가 역전된 현재의 비극을 드러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관통해 마침내 다다른 왕성 앞 광장에는 설탕사과 나무 숲속에서 온갖 계층의 인간과 요정들이 밝은 색채 속에서 장난기 가득하게 함께 웃고 있는 평화로운 군상이 가득했다. 그리고 광장 가장 깊숙한 중심부에는 찰랑이는 금발에 고결한 의지를 담은 채 은사와 다이아몬드 파편 같은 설탕 결정이 박힌 백색 옷을 입은 인간 왕이 서 있었다. 그 정면에는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이 흐르는 한쪽 날개를 펴고 칠흑의 옷에서 은빛 오로라 같은 광채를 뿜어내는 요정왕 샤르 펜 샤르가 웅장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두 왕의 사이에는 형형색색의 덩굴장미가 하늘을 향해 엉켜 있었고, 그 장미들이 소중히 감싸 안은 티 없이 깨끗하고 매끄러운 하얀 석판을 향해 두 왕이 조용히 손을 맞대고 있었다. 아무런 글귀도 새겨지지 않은 그 하얀 공간에서 마땅히 새겨져야 할 미래의 약속과 숭고한 염원을 읽어낸 에릴은 자신도 모르게 뺨 위로 눈물을 흘렸다. 이름을 지우고 도망쳤던 자신의 초라함을 깨달은 에릴은, 괴롭더라도 끊임없이 고뇌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생명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임을 자각했다. 에릴은 아침 햇살 속에서 온몸으로 빛을 뿜어내는 두 왕의 형상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자신 또한 태어날 때부터 왕의 숙명을 지녔음을 기억해 내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4장 연인의 곁으로]

 

차디찬 돌바닥에 누워 있던 앤은 자신이 만들어낸 요정왕의 설탕과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을 받아 검게 빛나는 조각상에는 애틋한 그리움이 서려 있었고, 앤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대상만을 온전히 빚어낼 수 있는 장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수면 부족으로 비틀거리면서도 앤은 은설탕 자작 휴가 정한 기한 내에 작품을 완성했다는 가슴 벅찬 만족감을 느꼈다. 어깨 위의 미스릴이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는 사이, 앤은 이 설탕과자가 샤르와 요정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주변의 장인들이 지쳐 쓰러져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앤은 요정왕과 인간왕의 설탕과자 앞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익숙한 요정 펠릭스를 발견했다.

 

그 순간 아침 햇살 속에서 펠릭스의 전신이 은백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더러운 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자 숨겨져 있던 두 장의 아름다운 은빛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고, 적갈색 머리카락은 별빛을 머금은 은백색으로 변형되었다. 그가 바로 모습을 감추고 찾아온 에릴 펜 에릴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앤은 충격을 뒤로한 채 곧장 달려가 그를 품에 꼭 껴안았다. 에릴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기적 같은 현실에 앤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했다. 장인들이 에릴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멀찍이 물러선 사이, 에릴은 앤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그동안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가죽 주머니에 담긴 것은 설탕과자의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최초의 은설탕이었다. 은설탕을 움켜쥐려던 앤은 이것이 인간인 자신이 멋대로 휘둘러서는 안 될 요정들의 염원이 담긴 물건임을 깨닫고 행동을 멈추었다. 앤은 에릴에게 이 은설탕은 샤르의 손을 거쳐 인간 왕에게 전달되어 대등한 서약을 맺는 데 쓰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에릴은 눈앞에 정렬된 아름다운 설탕과자들을 바라보며, 설탕과자가 사라지는 것이 싫다는 나름의 대답과 함께 은설탕을 앤에게 다시 쥐여주며 샤르에게 직접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에릴의 주관과 성장을 확인한 앤은 그의 손을 감싸 쥐며 고마움을 표했고, 이 은설탕을 통해 국왕의 마음을 돌려 전쟁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갑자기 에릴은 앤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추더니 샤르를 찾으러 가자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미스릴이 경악하며 앤의 어깨 위로 뛰어올라 에릴을 다그쳤지만, 에릴은 미소를 지으며 미스릴에게도 협조를 구했다. 골목길을 내달리며 숨을 헐떡이던 앤은 샤르가 폭주하는 라팔을 저지하러 갔을 것이라 확신했다. 라팔의 행방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앤은 에릴의 손을 이끌고 요정 상인 길드장 레지널드 스토의 저택으로 방향을 틀었다. 피로로 비틀거리는 앤을 에릴이 지탱해 주는 가운데, 미스릴은 앤의 어깨에 올라 타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같은 시각, 키스 파웰은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는 끝없는 설탕과자 거리에 마음을 빼앗긴 채 서 있었다. 노아를 비롯한 홀리리프 성의 요정 장인들이 다가와 완성의 기쁨을 나누었고, 이들은 은설탕 자작의 지시를 기다리기 위해 왕성 앞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 중앙에 위치한 앤의 요정왕 조각상을 본 키스는 깊은 감동을 받았으나, 정작 그 자리에 앤이 보이지 않자 불길한 불안감을 느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편 페이지 공방의 엘리엇 코린즈와 올란드, 발렌타인 등의 장인들 역시 극도의 피로를 호소하면서도 일의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장인장 올란드의 판단에 따라 깊이 잠든 나디르를 깨워 왕성 앞 광장으로 합류했다.

 

래드클리프 공방의 조나스는 지쳐서 길가에 주저앉아 있었으나, 숙부 마커스로부터 자신과 스텔라 녹스가 차기 수장 후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조나스는 늘 자신을 보살펴 주던 요정 캐시의 날개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모여든 장인들을 보며 만족감에 젖어 있던 휴 머큐리는 앤이 일부러 공백으로 남겨둔 순백의 석판 조각상을 보며 장인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 어우러진 결과물에 감탄했다. 캣이 설탕과자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털어놓자, 휴는 특유의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며 동료들을 다독였다. 이윽고 휴가 광장에 모인 수많은 장인과 요정들 앞에서 작업이 끝났음을 선언하자, 성 루이스턴 벨 교회의 아침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온 광장의 장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앤은 레지널드 스토의 저택 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렸고, 미스릴은 스토를 불러내기 위해 자신을 삼백 크레스짜리 요정이라며 공짜로 넘기겠다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문을 열고 나타난 스토는 앤의 뒤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에릴을 몸값 삼백 크레스의 요정으로 착각하고, 샤르가 라팔을 매복 저지하기 위해 루이스턴 근교의 좁은 길목으로 향했다는 정보와 함께 지도를 건넸다. 그러나 스토는 자신이 착각한 대상이 에릴이 아닌 미스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분노하며 미스릴을 앤의 품으로 던져버렸다. 스토는 이번 정보 제공을 왕가와의 협상이 시작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치겠다고 말했고, 앤은 떠나기 전 스토에게 머지않은 미래에는 요정을 사고파는 행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스토가 상인으로서의 철저한 생존 본능을 드러내며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자, 앤은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온 거리에 가득 울려 퍼지는 벨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샤르가 있는 곳을 향해 에릴과 함께 다시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5장 페어리 테일]

 

목적지도 없이 유유자적하게 남쪽 가도를 따라가던 라팔은 가도 주변의 마을들을 습격하며 남하를 이어갔다. 일행의 소문이 널리 퍼진 탓에 인간들은 이미 피난을 가고 없었기에, 요정들은 버려진 식량과 말을 손쉽게 약탈하며 전진했다. 빌세스 산맥에서부터 함께한 한 요정이 라팔에게 다가와 에릴의 행방과 목적지를 물으며, 루이스턴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대군을 마주해 위험해질 것이라며 불안을 호소했다. 라팔은 싸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며, 무모한 싸움 외에 요정들이 자유로워질 다른 길은 없다고 단언했다. 정면을 주시하던 라팔은 도적 떼처럼 날뛰던 요정들이 냉정을 찾고 자신들의 행위가 어리석음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라팔은 이 집단이 곧 와해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요정의 긍지를 위해 싸움을 멈출 수 없었고, 에릴이 진작 나타나 요정들이 인간과 맞서 싸우는 광경을 보고 진정한 왕으로 각성하기를 바랐다. 그 순간 전방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인간 기병 정찰대가 라팔 일행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라팔은 드디어 인간들과 제대로 맞붙을 때가 왔음을 느끼며 전율했다. 좁아진 가도 왼쪽에는 절벽이, 오른쪽에는 격류가 흐르는 단애가 펼쳐진 외통수 길에서 강 건너편과 절벽 위의 인간들이 구경꾼처럼 자신들을 내려다보자 라팔은 구역질을 느끼며 에릴이 오기만을 기도했다. 그때 가도 전방에 등을 곧게 펴고 선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의 요정 샤르 펜 샤르가 라팔의 시야에 우두커니 나타났다.

 

한편 레지널드 스토에게서 라팔이 남하 중이며 샤르가 협곡에서 매복해 기다릴 것이라는 정보를 얻은 앤은 에릴과 함께 은설탕 자작의 별저에서 말을 빌려 북쪽으로 내달렸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르자 가도를 가득 메운 채 삼엄하게 포진한 왕국군이 보였고, 에릴은 황급히 말을 멈추어 세웠다. 이때 먼저 상황을 살피러 갔던 미스릴 리드 포드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와 샤르가 가도 한복판에 서서 라팔 일행을 기다리고 있으며, 왕국군 정찰병을 그냥 돌려보낸 채 혼자서 결판을 내려는 것 같다고 다급히 전했다. 왕국군이 남쪽에서 들이닥치면 샤르와 라팔 모두 공격받을 위기인 상황에서 에릴은 이번만큼은 물러나 달라고 라팔을 설득하기 위해 놀라운 도약력으로 단숨에 절벽 위로 사라졌다. 앤은 주머니 속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미스릴에게 빌려온 말을 부탁한 후, 군대를 전진시키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국왕에게 간청하기 위해 왕국군 병사들을 향해 달렸다. 가녀린 드레스 차림의 어린 소녀를 본 병사들은 경계하지 않고 농담을 던지며 길을 내주었고, 앤은 유연하게 병사들 사이를 빠져나가 진형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귀환한 정찰병은 화려한 갑옷을 입고 애마 위에 선 하이랜드 국왕 에드먼드 2세 앞에 무릎을 꿇고 전방 협곡에서 요정왕 무리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이어 정찰병은 군단 사이에 한 요정이 가로막고 서서 약속을 지킬 테니 움직이지 말고 인간들은 지켜보기나 하라는 전언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국왕은 그 요정이 샤르임을 직감했으나, 등 뒤의 재상 콜렛 공작은 백성들의 염원과 왕국의 안정을 내세우며 지금 당장 진군 명령을 내릴 것을 필사적으로 다그쳤다. 에드먼드 2세는 고뇌 끝에 왕으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 출격 명령을 내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후방에서 거대한 군대 틈바구니를 헤치고 나타난 앤 할퍼드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간절하게 외쳤다. 앤은 인간을 해치는 요정왕을 인간과 살아가려는 요정왕이 처단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서약을 성립시키려는 것이니 군대를 멈추고 기다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에드먼드 2세는 이미 군을 전개했고 백성들이 요정왕 토벌을 원하고 있기에 적의 간청을 들어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찰나의 절망을 느낀 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드레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슴에 소중히 품었다. 그리고 호위병들의 포위망을 벗어난 곳에서 앤은 만약 지금 출격 명령을 내린다면 설탕과자는 앞으로 천 년의 세월 동안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며 국왕을 향해 외쳤다.

 

앤은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다시 정제하는 데 천 년이 걸린다는 최초의 은설탕이었고, 그 모습을 본 에드먼드 2세와 콜렛 공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폐하가 진군을 명한다면 이것을 강에 던져버리겠다고 외친 앤은 곧장 몸을 돌려 병사들 사이를 쏜살같이 빠져나가며 북서쪽 초원을 향해 달렸다. 추격하라는 공작의 날카로운 명령이 떨어졌지만 앤은 아슬아슬하게 손길들을 피하며 거센 강물 소리가 울려 퍼지는 절벽 끝에 다다랐다. 추격해 온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앤은 가죽 주머니를 강물 위로 멀리 내뻗으며 더 다가오면 던지겠다고 완강하게 경고했다. 이때 국왕 에드먼드 2세가 콜렛 공작, 헤이그 백작과 함께 기병을 대동하고 초원으로 들어와 병사들을 멈추고 앤을 매섭게 내려다보았다. 앤은 숨을 몰아쉬며 북쪽 가도를 가리켰고, 그곳에는 검은 요정왕 샤르와 머리칼이 불꽃 같은 주홍색으로 변해가는 요정왕 라팔이 대치하고 있었다. 앤은 검은 요정왕이 날뛰는 요정왕을 막아 인간과 함께 살아가려는 요정의 의지를 증명할 것이라며 국왕에게 그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 간곡히 애원했다.

 

가도 북쪽에서 라팔의 군단을 마주한 샤르는 은빛 검을 쥐고 전방을 주시하던 중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느꼈다. 왕국군 기병대에게 포위된 채 절벽 끝에서 최초의 은설탕을 방패 삼아 군대를 가로막고 있는 앤의 모습을 발견한 샤르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벌고 있음을 직감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이상 샤르는 이 자리에서 라팔을 단죄하여 인간의 왕들에게 요정왕의 결단이 진실임을 증명하겠다고 다짐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라팔은 인간 왕의 군대를 움직이게 한 샤르를 비웃으며 칼을 뽑아 들고 마상에서 거칠게 쇄도했다. 샤르는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하며 달려 나가는 말의 뒷발목을 베어 라팔을 낙마시켰고, 수풀 속에서 맹렬한 검극을 이어갔다. 본래의 능력을 잃어 전투력이 떨어진 라팔을 샤르가 절벽 끝으로 몰아붙이던 순간, 라팔의 수하가 말을 몰고 가세해 샤르의 오른쪽 어깨를 깊숙이 베었다. 생명의 근원인 은빛 입자를 흩날리며 궁지에 몰린 샤르가 정면을 가로막는 기마 요정 때문에 라팔을 놓칠 위기에 처했을 때, 절벽 꼭대기에서 맑고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절벽 위에는 은빛 머리카락과 두 장의 날개를 지닌 요정왕 에릴이 서서 모두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에릴의 등장에 라팔의 수하들이 일제히 얼어붙었고 라팔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형제석의 이름을 불렀다. 샤르는 이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도약하여 라팔의 복부와 어깨를 깊숙이 베었으나, 라팔 역시 샤르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며 두 사람은 서로의 손목을 움켜쥔 채 가까운 거리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거센 강바람이 두 요정왕의 날개를 거칠게 휘감는 가운데, 에릴은 최초의 은설탕이 지금 앤의 손에 있다고 외쳤다. 에릴은 요정과 인간이 공존하는 미래의 환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자신이 요정왕임을 선포하며, 인간과의 동행을 막아서는 요정왕은 필요 없으니 흑의 요정왕에게 명한다고 소리쳤다. 비록 에릴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으나 라팔은 에릴이 자신을 멸하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음을 깨달았다. 거대한 절망 속에서 세상이 자신을 증오함을 이해한 라팔은 허망하게 웃으며 샤르를 밀어내던 힘을 빼버렸고, 검을 놓은 채 고꾸라지는 샤르를 두 팔로 강하게 옭아맸다.

 

샤르는 라팔이 힘을 빼자 중심을 잃고 엎어졌으나 이내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수고를 덜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는 부상이 깊어 이길 수 없었기에, 샤르 역시 라팔을 안고 절벽 아래 격류로 함께 떨어질 각오를 다졌다. 그것이 라팔을 확실히 끝내고 인간들에게 요정왕의 희생을 직접 목격하게 하여 앤과 요정들이 바라는 미래를 여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라팔은 내 곁에 아무도 없다고 온화하게 중얼거렸고, 샤르는 함께 죽어주겠다고 답하며 차가운 강바람 속으로 라팔과 함께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탁류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자 절벽 위의 앤은 비명을 질렀고, 인간들과 가도의 요정들 모두 경악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콜렛 공작이 앤에게 최초의 은설탕을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앤은 요정왕의 허락 없이는 줄 수 없다며 하류로 사람을 보내 샤르를 구해달라고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그때 에릴이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로 인간들 사이를 빠져나와 앤을 품에 안았다. 연인의 소멸을 현실로 받아들인 앤이 오열하는 사이, 에릴은 한 손으로 최초의 은설탕 주머니를 국왕 에드먼드 2세에게 내밀었다. 에릴은 자신이 유일하게 남은 요정왕임을 밝히며 인간과 공존하고 싶다는 맹세를 전했고, 검은 요정왕이 바랐던 서약이 성립되었는지를 물었다. 사태를 목격한 수많은 눈이 있었기에 사실을 왜곡할 수 없었던 에드먼드 2세는 말에서 내려 에릴의 은설탕을 받아들였고, 명예와 목숨을 걸고 서약을 보증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국왕은 샤르에게 맡아두었던 요정의 날개가 든 작은 가죽 주머니를 앤에게 건넸다. 앤은 주머니에서 아스라이 빛나는 반투명한 날개를 꺼내 가슴에 깊이 품었다. 본체가 소멸하면 날개도 결국 사라지지만 아직 형태가 남아있다는 에릴의 말에, 앤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포기하지 않고 샤르를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 찬란한 가을바람이 초원을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검은 요정왕이 염원했던 서약이 마침내 맺어졌고 설탕과자는 영영 사라질 위기를 모면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설탕 사과의 붉은 열매가 왕국 전역에 열린 수확 철, 앤은 전재산을 털어 지은 루이스턴 인근의 작은 벽돌집에서 설탕 사과를 수확하고 있었다. 그 곁에서 반년 전부터 유색 설탕 사과 재배 실험을 하던 작은 요정 미스릴 리드 포드는 마침내 빨간색과 노란색 발색에 성공하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앤은 미스릴의 성과를 축하하며 미소를 지었지만, 멀리 보이는 홀리 리프 성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성에서 수행하던 요정들은 작년 말 각 파벌의 공방으로 흩어졌고, 키스 파웰은 여전히 성에 남아 새로운 견습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당시 인간 왕과 맹약을 맺은 요정왕 에릴은 자취를 감추기 직전 앤에게만 조용히 필두를 찾아가겠다는 뜻을 전했으며, 에릴의 소문이 퍼지면서 인간들의 요정 시장 방문은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였다.

 

상념에 잠겨 있던 앤의 앞으로 마차 두 대가 다가왔다. 앞선 짐마차에는 페이지 공방의 수장 대리인 엘리엇 코린즈와 키스가 타고 있었고, 뒤이어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와 캣, 그리고 살림이 탄 검은 마차가 도착했다. 키스는 미스릴이 키워낸 색깔 설탕 사과의 비결을 다른 장인들과 함께 확인하고자 이들을 데려온 것이었다. 미스릴은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성과를 자랑했고, 이에 흥미를 느낀 캣이 밤을 새워서라도 제조법을 알아내겠다고 선언하면서 일행은 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결정했다.

 

앤은 손님들을 뒤따라 집으로 향하다가 문득 자신을 부르는 듯한 환청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바람 소리뿐이었다. 앤은 지난 1년 동안 행방불명된 샤르 펜 샤르의 흔적을 찾아 헤맸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고, 그가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도록 가도 옆에 이 집을 지은 것이었다. 그녀는 품에 지닌 가죽 주머니 속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샤르의 날개를 확인하며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밤 앤의 집에서는 벤자민과 앤이 준비한 음식과 와인으로 시끌벅적한 만찬이 열렸다. 식사 도중 휴는 재상이었던 콜렛 공작이 신분을 버리고 왕이 없는 대륙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또한 앤은 마르그리트 왕비가 여전히 고치 탑에서 홀연히 사라진 루루 리프 린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한구석에 통증을 느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도 모두가 샤르의 부재를 의식하며 애써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밤이 깊어가도록 미스릴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새벽녘이 되자 앤은 다시 한번 샤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마르그리트 왕비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은 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바구니를 챙겨오겠다는 핑계를 대며 설탕 사과 숲으로 뛰어갔다. 앤은 주먹을 쥐고 눈물을 흘렸고, 그녀가 걱정되어 뒤따라온 미스릴이 애써 쾌활하게 분위기를 띄우려 하자 결국 참았던 속마음을 쏟아냈다. 앤은 샤르가 루루처럼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면서도 그를 위해 승혼일의 설탕과자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며, 더 많이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그 순간 숲속에서 앤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미스릴이 비명을 지르며 가리킨 곳을 바라본 앤은 안개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과 연녹색 외날개를 반짝이며 걸어오는 샤르를 발견했다. 환상이 아님을 깨달은 앤은 샤르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았고, 샤르는 앤을 강하게 안아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샤르는 기억을 잃고 낯선 곳에서 방황하다가 가을의 설탕 사과 향기를 맡고 앤을 기억해 내어 돌아온 것이었다. 소란을 듣고 문밖으로 나온 일행이 멀찍이서 이 모습을 경악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샤르에게 먼저 깊은 입맞춤을 건넸고 샤르 역시 그녀를 바짝 끌어당기며 화답했다. 두 사람의 발치에는 그들을 축복하듯 어느새 풀 열매로 엮은 반지 하나가 살포시 놓였다.

 

 

이후 왕국에는 요정왕들의 저주와 존재감에 대한 두려움으로 요정을 노예로 삼는 인간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150년 뒤에는 요정 상인 길드가 자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키스 파웰은 은설탕 요정 육성에 힘써 공방을 크게 키운 뒤 15년 후에 은설탕 자작이 되어 위대한 장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엘리엇 페이지는 3년 뒤 페이지 공방의 수장이 되었고 10년 뒤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5년 만에 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캣은 여러 세대에 걸친 자작들의 조언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휴 머큐리는 위기를 타개한 자작으로 기록되었으나 10년 뒤 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호위인 살림은 국교회 묘지기가 되어 그의 곁을 지켰다. 전무후무한 설탕과자를 빚어낸 여성 은설탕사 앤은 샤르, 미스릴과 함께 오두막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으며, 훗날 실버 웨스트르 성의 화재로 명부가 소실되어 그녀의 이름은 흐릿한 전설로만 전해지게 되었다. 앤은 다가올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을 키워가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설탕과자를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