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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발 작품

슈거 애플 페어리 테일 18권- 은설탕사와 진홍의 새벽 챕터 별 스토리 요약

by 미도착 원고함 서고지기 2026. 5. 27.

 

[1장 숲속의 작은 설탕과자점]

 

은회색 가지와 푸른 잎이 무성한 설탕사과 나무숲 한복판의 작은 집에서, 설탕과자 장인 앤 할퍼드는 일곱 살 생일을 맞이하는 꼬마 손님 미리암에게 정성껏 만든 설탕과자를 선보였다. 두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공방 모양의 설탕과자는 실존하는 건물을 동화 속 장면처럼 정교하고 아름답게 재현해 내어 영롱하게 반짝였다. 미리암은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기뻐했고, 아이의 보호자이자 동료 장인인 키스 파웰은 앤의 훌륭한 솜씨에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집이 왕도 루이스턴 외곽에 위치해 손님이 적은 앤의 처지를 걱정하는 키스에게 앤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고, 키스는 대량 판매보다는 한 사람과 진심으로 마주하며 과자를 만드는 앤의 방식을 지지해 주었다. 키스는 올해 반드시 왕실 훈장을 받아 은설탕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밝힌 뒤, 대금을 지불하고 보물처럼 과자를 품에 안은 미리암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들이 출발하려던 찰나, 앤의 집 식구이자 요정인 미스릴 리드 포드가 숲속에서 하얀 봉투를 머리 위로 받쳐 들고 신나게 달려왔다. 그 편지는 왕국 최고의 장인이자 은설탕 자작인 휴 머큐리가 실버 웨스트르 성에서 보낸 것이었다. 미스릴과 미리암이 서로 누가 더 조그맣고 정신 사나운지 티격태격 다투며 소란을 피우자, 또 다른 전사 요정이자 앤의 남편인 샤르 펜 샤르가 나타나 미스릴을 낚아채며 소동을 가라앉혔다. 미리암은 결혼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여전히 서툴고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마차를 타고 떠나갔고, 앤은 남편 샤르와 미스릴을 바라보며 가족이라는 따스한 유대감 속에서 행복을 느꼈다. 앤이 봉인장을 뜯고 읽어 내려간 휴의 편지에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 장인들의 대표로 앤이 선출되었으니 6일 뒤 샤르와 미스릴을 동반하여 실버 웨스트르 성으로 등성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미스릴은 자신들을 부록 취급했다며 분개했지만, 샤르는 아내를 홀로 보낼 수 없다며 동행을 결정했고, 세 사람은 오랜만의 여행 준비를 마친 뒤 마차를 타고 북부 도시 웨스트르로 향했다.

 

사흘간의 여정 끝에 도착한 실버 웨스트르 성은 호수와 숲에 둘러싸인 백아의 성으로 장엄한 위용을 자랑했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성 안의 귀빈용 객실에 들어선 앤 일행 앞에는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가 이미 소파에 길게 다리를 꼬고 앉아 유유자적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휴는 특유의 얄궂은 성격으로 앤에게 샤르를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는 식의 질 나쁜 농담을 던져 샤르를 자극하고 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장난 섞인 인사가 끝난 뒤 휴는 왕국 전체의 설탕사과 숲을 조사해 그려 넣은 거대한 지도를 침대에 펼쳐 보였다. 그는 최근의 흉작과 정제 불능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작년부터 설탕사과 수확 통제 규칙을 시행했으며, 각 파벌과 독립 장인 집단에게 사과를 공평하게 배분하기 위한 절차로 무소속 은설탕사인 앤을 명목상 대표로 세운 것이라 설명했다.

 

휴가 앤을 다른 장인들과 달리 사적으로 따로 불러낸 진짜 이유는 지도 북쪽에 위치한 대규모 설탕사과 숲 때문이었다. 웨스트르의 모직물 상인인 스칼렛 에이워스라는 소유주가 은설탕 자작과의 협상을 완강히 거부하며 문전박대하더니, 은설탕사 에마 할퍼드를 대리인으로 내보내면 협상을 고려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앤은 자신의 어머니인 에마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음을 밝히며 의아해했으나, 휴는 더욱 기묘한 사실을 덧붙였다. 에이워스의 대리인 자격으로 편지를 보낸 인물의 이름이 길버트 할퍼드라는 것이었다. 앤이 영문을 몰라 묻자, 휴는 과거 선대 다우닝 백작의 명으로 조사했던 비밀을 건넸다. 십칠 년 전 내전 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앤의 친아버지 이름이 바로 길버트 할퍼드였으며, 그가 아직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소식에 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2장 여상인의 이름은 붉은색]

 

앤 할퍼드는 은설탕 자작 휴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발신인은 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에마 할퍼드에게 보내는 내용이었고, 서명된 이름은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앤의 아버지 길버트 할퍼드였다. 동행한 요정 샤르는 질 나쁜 장난이나 누군가의 책략일 수 있다며 의심했으나, 앤은 편지에 적힌 세부 내용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편지에는 에마가 살아생전 소중히 여기며 타인의 출입을 철저히 금했던 마차 내부의 붙박이 작업대와 유독 높았던 선반 위치, 그리고 이에 대해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마차의 구조와 어머니의 생전 모습을 세밀하게 기억하지 못하면 절대 쓸 수 없는 내용임을 깨달은 앤은 편지를 보낸 이가 진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인정했다.

 

 

휴는 웨스트르의 거상인 스칼렛 에이워스가 설탕 사과 수확 건으로 에마와 협상하고 싶다며 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규모 설탕 사과 숲이 방치되어 썩거나 장인들이 훔쳐 가는 사태를 막기 위해, 에마가 세상을 떠난 지금 딸인 앤이 대신 협상가로 나서줄 것을 제안했다. 샤르는 부모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상황이 수상하다며 위험을 우려했으나, 휴는 거상인 스칼렛의 신용과 호위로서의 샤르의 능력을 믿고 동행을 권유했다. 앤 역시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장인으로서 소중한 설탕 사과가 허무하게 버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휴의 제안을 받아들여 협상에 임하기로 결심했다.

 

앤이 협상을 수락하자마자 휴는 심부름꾼을 보냈고, 스칼렛으로부터 즉시 대면을 수락한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날 밤 샤르는 발코니에서 불길한 예감을 지우지 못한 채 앤과 함께하는 소중한 일상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방에서 나온 앤은 숙취로 잠든 미스릴의 근황을 전하며 샤르에게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샤르는 앤을 향한 깊은 애정과 아내에 대한 걱정을 숨기지 않으며 일을 자작에게 맡겨두고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앤은 설탕 사과를 확보해 파벌이 없는 장인들에게도 나누어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샤르는 중심을 잡고 올곧게 나아가는 앤의 모습에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고, 두 사람은 달빛 아래에서 서로의 소중함을 다시금 확인했다.

 

다음 날 아침, 앤은 휴가 챙겨준 협상 지침 서류를 안고 직접 마차를 몰아 실버 웨스트르 성을 나섰다. 숙취로 괴로워하는 미스릴과 든든하게 곁을 지키는 샤르와 함께 가도를 달리던 앤은 정오가 되기 전 시외곽의 완만한 언덕 위에 위치한 에이워스의 별저에 도착했다. 저택 현관 앞에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을 가진 거상 스칼렛 에이워스가 그녀에게 간절히 매달리는 한 남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사이러스로, 그는 에이워스 상회로 넘어간 조상 대대의 설탕 사과 숲을 돌려달라고 절박하게 애원하고 있었으나 스칼렛은 단호하고 차갑게 거절했다. 사이러스는 용무가 끝나면 숲 외곽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긴 채 굳은 표정으로 마차를 몰아 떠났고, 앤은 멀어지는 그의 손가락 끝에 온갖 색이 배어 있는 것을 보며 그가 장인임을 직감했다.

 

소동이 일단락된 후 스칼렛은 앤 일행을 화사한 미소로 맞이했다. 사이러스가 최근 이혼한 전남편이며 재산 문제로 억지를 부리는 중이라고 설명한 스칼렛은, 앤을 보며 17년 전 아장아장 걷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해 앤을 놀라게 했다. 또한 인간이 요정과 결혼했다는 고백에도 비난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묘하게 쓸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스칼렛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진홍색 드레스를 입고 다시 나타나 대담한 태도로 담화실의 좌석을 권했다. 앤이 휴의 서류를 꺼내며 본격적으로 설탕 사과 수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려 하자, 스칼렛은 서두르지 말라며 고용인 핀리에게 등불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스칼렛은 교섭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앞장섰다. 앤과 샤르는 그녀를 따라 나선형 계단 뒤편에 숨겨진 작은 문을 지나 서늘하고 쾌적한 공기가 감도는 어두운 지하 저장고로 내려갔다. 방 안쪽의 작은 탁자 위에는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고, 스칼렛은 탁자 위에 있던 무언가를 덮고 있던 상자를 들어 올린 뒤 램프 불빛을 높이 치켜들었다. 주황색 불빛 아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대상을 목격한 앤은 큰 충격을 받고 자신도 모르게 탁자 앞으로 급히 달려 나갔다.

 

[3장 협상의 시작]

 

앤은 램프 불빛 아래 처참하게 망가진 17년 전의 설탕과자를 내려다보았다. 백합을 닮은 연하늘색 꽃잎이 겹겹이 쌓여 레이스처럼 물결치던 그 꽃다발 형태의 과자는 세월의 흐름 속에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형태가 허물어져 있었다. 곁에 있던 에이워스 상회의 수장 스칼렛은 이 과자가 17년 전 앤의 어머니인 에마 할퍼드가 자신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밝혔으며, 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작품을 만들어 내놓는다면 은설탕 자작의 영지 내 설탕 사과 수확을 허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원래 스칼렛이 에마를 수소문하던 중 마차 제작공이자 에마의 헤어진 남편이라 주장하는 길버트 할퍼드가 나타나 은설탕 자작에게 편지를 보내 에마를 대리인으로 지명하게 유도하는 계략을 꾸몄던 것이었다. 에마가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딸인 앤이 대리인으로 오게 되었고, 스칼렛은 앤이 어머니와 완벽히 똑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확을 허락하지 않겠으며 설탕 사과가 전부 썩어도 상관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스칼렛이 이 과자에 집착하는 이유는 17년 전 결혼과 동시에 상회를 세웠을 때 찾아온 막대한 행운을, 최근 진출한 숙적 갤리건 상회를 막아내기 위해 다시금 거머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길버트는 편지만 남긴 채 사역하는 요정을 데리고 서둘러 떠났으며 앤이 이곳에 올 즈음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앤은 심사숙고한 뒤 내일 답을 주겠다며 별채를 나섰다.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몰고 가던 앤과 샤르, 미스릴은 길가에 망연히 서 있던 스칼렛의 전남편 사이러스 올코트를 만났다. 사이러스는 스칼렛의 외출 여부를 물으며 씁쓸해했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소중한 올코트 가문의 설탕 사과 숲을 스칼렛이 강탈했다고 주장했다. 이때 숲길 끝에서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손등과 목에 깊은 흉터가 가득한 여인 제인이 나타나 사이러스를 맞이했고, 두 사람은 다정하게 서로를 감싸 안았다. 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마차에서 내려 그들을 쫓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청했고, 사이러스의 안내를 받아 그들의 단출한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오두막 안에는 간판을 그리는 도구들과 함께 화가인 사이러스의 그림들이 놓여 있었는데, 벽면에는 스칼렛이 요구했던 바로 그 백합을 닮은 연하늘색 꽃 그림이 걸려 있었다. 앤은 이 그림을 통해 설탕과자의 본래 색과 형태를 파악할 수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스칼렛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뇌했다. 사이러스는 17년 전 결혼 당시 상회 명의로 땅을 이전하되 배우자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계약서를 보여주며, 작년 말 이혼하고 제인과 재혼하면서 권리를 잃었지만 스칼렛과 대화하면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앤은 위태로울 정도로 선량한 그의 모습을 보며 스칼렛의 숨겨진 의도에 의구심을 품었으나, 장인으로서 의뢰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본분을 다하기 위해 도전을 결심했다.

 

성으로 돌아온 앤은 이틀 뒤 은설탕 자작 휴에게 복잡한 사정을 보고하고 은설탕 한 통을 받아 다시 스칼렛의 별저로 향했다. 휴는 상대의 기억에 의존해 완벽한 재현을 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불합리한 일이라 경고했으나, 앤은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는 순수한 희열과 어머니의 작품을 되살린다는 설렘을 안고 마차를 몰았다. 별저의 채광 좋은 2층 객실에 짐을 푼 앤은 무뚝뚝한 고용인 핀리의 안내를 받아 지하실에서 에마의 설탕과자를 조심스레 옮겨왔다. 에마가 남긴 수십 장의 도안 중 일치하는 것은 없었지만, 사이러스의 그림을 떠올린 앤은 형태 복제를 넘어 17년 전 어머니가 담았던 진심과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자아내겠다고 다짐하며 석판 위에 은설탕을 붓고 작업에 몰입했다.

 

앤이 작업에 빠져들자 샤르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방을 나와 저택 주위를 배회하며 길버트 할퍼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때 말을 타고 저택으로 돌아온 스칼렛이 샤르를 발견하고 접근해, 예쁘장한 얼굴로 순진한 아가씨를 홀려 편하게 지낸다며 독설을 내뱉었다. 샤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스칼렛이 사랑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겁쟁이이며 전남편의 땅을 빼앗은 죄책감 때문이냐고 서늘하게 비아냥거렸다. 사이러스와 그의 새 아내 제인이 서로를 무척 아끼며 잘 지내고 있다는 샤르의 말에 스칼렛은 씁쓸하게 콧방귀를 뀌었으나, 자신은 상처를 입었기에 사랑을 의심하며 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나직하게 읊조린 뒤 불꽃 같은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저택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4장 길버트의 요정]

 

은설탕을 치대고 있으면 기쁨이 차오른다. 자신의 손끝에서 색이 감돌고 형태가 빚어지는 과정이 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녀는 여름철 손의 온기로 인해 설탕이 끈적거리는 것을 막으려 나무통의 찬물에 자주 손을 담가 열을 식혀가며 공들여 반죽을 매만졌다. 한 번 잃었던 기술을 수치와 순서로 정리해 다시 익힌 버릇 때문에 반죽 치는 횟수를 세던 그녀는, 수치와 감각이 완벽히 합치되는 순간 확신을 얻고 순백의 덩어리 위에 파란 색가루를 극소량 떨어뜨렸다. 은은하고 옅은 푸른빛으로 물든 반죽을 보며 이 색이 정말 충분한지, 옅은 푸른색의 그라데이션이 어떤 느낌일지 미리 확인하고 싶어진 앤은 꽃 그림을 다시 보기 위해 사이러스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미스릴 리드 포드에게 말했다. 미스릴이 동행하려 했으나 때마침 방으로 돌아온 샤르 펜 샤르가 핀리에게 말을 빌려오면서, 앤과 샤르만 말에 올라타 매디슨의 숲으로 향했고 미스릴은 집을 보게 되었다.

 

사이러스와 제인이 사는 통나무집에 도착했을 때 사이러스는 간판을 납품하러 가고 없었지만, 집을 지키던 제인은 설탕과자 제작에 참고하고 싶다는 앤의 부탁에 흔쾌히 그림을 보여주었다. 샤르가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앤은 투명한 푸른빛 너머에 보라색이 살짝 감도는 그림 속 꽃을 감탄하며 바라보았고, 제인은 그 그림이 남편이 자신에게 바친 것이라며 그의 다정함과 너그러움을 칭찬했다. 작년까지 사이러스가 스칼렛의 남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잠시 복잡한 감정을 느끼던 앤은 제인으로부터 샤르와 부부냐는 질문을 받고 부끄러워하며 샤르를 사랑한다고 답했다. 제인은 사이러스가 없으면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이 자신의 가치라는 극단적인 사랑을 고백했고, 놀란 앤의 표정에 사과하며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 집에서 겪은 가혹한 일 끝에 작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사이러스를 만난 것이 구원이었음을 넌지시 드러냈다.

 

제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스칼렛의 별저로 돌아온 앤은 곧장 머릿속에 완벽히 그려진 색을 토대로 중심이 될 꽃의 색 조율에 착수했다. 반죽에 파란색과 미량의 빨간색 색가루를 섞어 치대자 이면에 묘한 보랏빛이 비치는 연푸른색이 완성되었고, 이를 본 미스릴과 샤르는 그림과 똑같다며 찬사를 보냈다. 에마의 작품을 완벽히 재현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는 순간,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스칼렛이 색은 같지만 광택이 조금 다른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유령을 본 듯 침대 밑으로 숨어버린 미스릴을 뒤로한 채 앤은 광택의 차이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 에마의 다정한 음성과 염원을 떠올린 앤은 신랑 신부의 잔잔한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랐을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내고, 찬란함 속에 차분함이 깃들도록 화려한 광택을 억제해야 한다는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최상의 광택을 낸 은설탕 덩어리 위에 일부러 거친 새하얀 은설탕 가루를 한 움큼 흩뿌려 다시 반죽했고, 미세한 알갱이들이 빛을 머금어 화려함 속에 차분한 흰색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17년 전의 부드러운 빛을 완벽히 재현해 내어 스칼렛의 감탄을 자아냈다.

 

스칼렛은 앤의 솜씨를 칭찬하면서도 허락 없이 사이러스의 집에 간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하며 그가 자신을 배신하고 땅을 돌려달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원망했다. 꽃 그림이 꼭 필요하다는 앤의 말에 스칼렛은 저택에도 비슷한 밑그림이 있으니 핀리를 시켜 옮겨다 주겠다며 매몰차게 방을 나갔다. 침대 밑에서 나온 미스릴이 스칼렛이 전남편을 증오한다고 투덜대자 샤르는 그녀가 사이러스의 새 아내에 대해 물어보며 동요했던 모습을 지적했고, 앤 역시 과거 샤르의 기억 속 리즈를 신경 쓰며 마음이 일렁였던 경험을 떠올리며 스칼렛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기에 화가 나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이튿날 아침, 핀리가 가져다준 선으로만 이루어진 미완성의 꽃 밑그림을 확인한 앤은 곧장 후속 작업에 돌입하여 사흘 동안 식사도 서둘러 해결하며 온 정신을 작업에 쏟아부었다. 샤르가 곁을 지켜주는 가운데 앤은 꽃잎의 투명함, 정교한 잎맥과 투조 문양, 이슬의 광채 등 에마의 의도를 하나하나 형상화하는 보물찾기 같은 시간에 깊은 기쁨을 느꼈다. 마침내 석양빛이 스며들 무렵 겹겹이 포개진 연푸른 꽃잎과 정교한 나비 날개, 선명한 물방울 광채를 지닌 차분하고 부드러운 기품의 설탕과자가 완성되었다. 미스릴과 샤르로부터 낡은 설탕과자가 그대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는 극찬을 받은 앤은 스칼렛과 교섭하기 위해 작품을 덮을 천을 찾다가, 창밖 마차 보관소에서 등 뒤에 날개가 한 장뿐인 금발의 요정이 자신의 마차 짐칸 문을 열려는 모습을 목격했다.

 

성역과도 같은 작업장에 장인이 아닌 이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앤은 소리를 지르며 방을 뛰쳐나와 마차로 달려갔고, 겁에 질린 요정에게 큰 소리를 내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이때 저택 뒤편에서 나타난 핀리가 경악하며 그 요정이 길버트 할퍼드라 자칭하는 사내가 데리고 다니던 요정임을 밝히고 앤에게 위험한 낌새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핀리가 요정에게 길버트의 행방과 용건을 다그치자, 요정은 길버트가 급한 일로 고향에 가면서 에마 할퍼드 앞으로 온 편지를 웨스트르에서 전하라고 명령했으나 은설탕사가 이곳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했다. 에마가 4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이 그녀의 딸인 앤이라고 밝히자 요정은 당황하면서도 결심한 듯 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편지를 건넸고, 연락처도 모른다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언덕길을 내려갔다.

 

뒤늦게 내려온 샤르의 촉구에 앤이 뜯어본 길버트의 편지에는 에마를 만나지 못해 아쉽다며 록웰주의 코셀에서 기다리겠다는 짧은 전언이 담겨 있었다. 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샤르는 편지가 전달된 경위에서 불길함을 감지했다. 타인을 이용해 에마를 유인하려던 자가 갑자기 정중한 요청도 없이 상대를 제 뜻대로 움직이려는 명령조의 편지를 보낸 점, 그리고 에마의 죽음을 알자마자 타깃을 딸인 앤으로 바꾼 기색이 역력하다는 점에서 편지를 쓴 자가 진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진 자임을 확신했다. 샤르는 핀리에게 놈의 정체를 캐내겠다고 선언한 뒤, 노을빛 속으로 은주색 광채를 흩뿌리며 편지를 전하고 남쪽 가도로 향하는 금발 요정의 뒤를 쫓아 맹렬히 달려 나갔고, 남겨진 앤은 불안감을 떨치며 핀리에게 스칼렛과의 교섭을 요청했다.

 

요정을 추격하던 샤르는 그녀가 웨스트르에서 왔다는 거짓말과 달리 남쪽 가도의 한 작은 마을 식당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고,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먼지막이 망토를 걸친 중년 남자와 접촉하는 것을 확인했다. 직접 요정을 붙잡아 캐묻기로 결심한 샤르는 식당을 나오던 요정 앞을 가로막고 남자의 정체를 다그쳤다. 겁에 질려 떨던 요정은 대답을 쥐어짜 내다 갑자기 휘청거리며 샤르를 향해 고꾸라졌고, 본능적으로 그녀를 받아낸 샤르의 눈앞에서 강렬한 금빛 섬광이 터져 나갔다.

 

그 시각, 별저에서는 핀리가 스칼렛의 개인실로 앤을 안내하며 그 설탕과자가 스칼렛을 옭아맬 뿐이라 안타깝다는 묘한 말을 남겼다. 서류와 지도가 빽빽한 치열한 집무실에서 스칼렛을 마주한 앤은 설탕과자의 보호천을 걷어냈지만,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스칼렛은 겉모습은 판박이처럼 닮았으나 17년 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감동이 없다며 협상 실패를 선언했다. 모호한 기준에 혼란스러워하던 앤은 판단하는 이의 기억과 어긋나면 틀렸다는 소리를 듣게 될 거라던 휴의 충고를 떠올렸으나, 장인의 자존심을 걸고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재현해 내겠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스칼렛 역시 앤의 고집을 보며 자신도 단지 17년 전의 작품이 간절히 갖고 싶을 뿐이며 아주 미묘하게 어딘가가 다르다고 진심 어린 어조로 덧붙였다.

 

한편, 금빛 섬광이 가라앉은 뒤 가도의 마을에 홀로 남겨진 샤르는 머릿속에 안개가 내려앉은 듯 의식이 저릿하고 기억의 실타래를 잃어버린 채 망연히 서 있었다. 그에게 다가온 마을 자경단 사내들이 주인 없는 아름다운 요정이라며 노리개로 삼아 팔아넘기려 거칠게 손목을 낚아채자, 샤르의 내면에서 억눌려 있던 분노와 투쟁 본능이 폭발했다. 자신의 등에 날개가 한 장밖에 없다는 상실감과 과거 리즈를 잃었던 피투성이 기억이 제멋대로 뒤섞이며 눈앞의 사내들을 리즈를 죽인 기사들로 착각한 샤르는 순식간에 은백색의 검을 구현해 냈다. 사내들을 단숨에 베어버리려던 찰나, 머릿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그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고 공포에 질린 사내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적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다시 붙잡힐지도 모른다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샤르는 고함을 뒤로한 채 가도를 따라 북쪽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5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꽃]

 

앤은 스칼렛과의 교섭이 실패로 끝나자 반쯤 넋이 나간 채 설탕과자를 들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주저앉았다. 무릎 위로 뛰어오른 미스릴이 결과를 묻자 앤은 스칼렛 자신도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며 답했고, 이대로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고민하겠다고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느덧 창밖은 짙은 남빛 밤하늘로 가득 찼고 길버트 할퍼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간 샤르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비를 예고하는 세찬 바람이 불어오자 앤의 마음에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앤은 밀려드는 공포를 억누르며 테이블 위의 설탕과자들을 유심히 비교했으나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창밖은 완벽한 칠흑의 어둠으로 변했다. 미스릴 또한 근심 가득한 얼굴로 창틀에 앉아 샤르를 걱정했고 앤은 자신 때문에 샤르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찾으러 가고 싶어 했지만 미스릴은 그가 근처 숙소에서 묵기로 했을지도 모른다며 말렸다.

 

그때 언덕길을 달려온 한 남자가 다급하게 자경단 초소의 문을 두드렸고, 소식을 들은 자경단원과 핀리가 급히 스칼렛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가 다시 현관으로 나와 마구간으로 향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곧이어 승마복 차림의 스칼렛이 앤의 방을 찾아와 근처 마을 자경단과 협력해 숲으로 숨어든 위험한 전사 요정을 잡거나 죽이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스칼렛이 한쪽 날개만 남은 채 은백색 검을 구현하는 흑발의 요정이라고 인상착의를 덧붙이자 앤은 그것이 샤르임을 직감하고 그가 사람을 습격할 리 없다며 소리쳤다. 스칼렛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은설탕사를 절망에 빠뜨릴 수 없어 동행하는 것이라며 앤의 팔뚝을 붙잡았고, 만약 필요한 상황이 오면 샤르를 죽이라고 명령하겠다는 냉철한 각오를 전했다. 미스릴을 방에 남겨둔 채 앤은 스칼렛의 백마 안장 뒤편에 올라탔고, 횃불을 든 핀리의 안내를 받으며 매디슨 숲을 향해 집어삼킬 듯한 어둠 속을 거세게 질주했다.

 

 

양옆으로 숲이 밀려드는 굽이진 길을 지나 매디슨 숲에 도착하자, 횃불과 무기를 든 수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포위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숲속에서 램프를 들고 달려온 사이러스는 요정이 제정신이 아니라며 가까이 가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앤은 샤르의 이름을 부르며 사내들 사이를 뚫고 공터 한복판으로 뛰어갔다. 공터에는 아름다운 흑발의 샤르가 백은의 검을 든 채, 시야에 걸리는 모든 것을 베어 넘길 듯한 잔인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스칼렛이 붙잡는 손을 뿌리친 앤은 샤르를 향해 다가가며 등 뒤의 자경단원들에게 활을 내려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샤르가 앤을 향해 칼날을 겨누자 앤은 공포에 휩싸이면서도 그를 지키겠다는 결의로 한 걸음 더 내디뎠고, 그 순간 기회를 노리던 사내가 샤르를 향해 화살을 쏘려 하자 앤은 궤도를 가로막으며 몸을 날렸다. 빗나간 화살에 분노한 샤르가 사내를 향해 탄환처럼 쇄도하자, 앤은 다시 날아온 화살이 허리춤을 스치는 순간에도 무모하게 그의 가슴팍에 뛰어들어 몸을 가득 껴안으며 제발 그만두라고 애원했다.

 

과거 자신의 날개를 앗아간 자들과 싸우고 있다는 기억의 혼란 속에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던 샤르는 가슴팍을 파고드는 폭신한 온기와 은설탕의 달콤한 향기를 맡는 순간 정신을 차렸고, 그것이 앤임을 깨닫고 백은의 검을 무수한 빛의 입자로 흩트렸다. 무기를 버린 샤르는 안도하며 우는 앤을 끌어안았으나, 이내 손바닥에 닿는 축축한 피를 확인하고 앤의 드레스 허리 부분이 붉게 젖어가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통 속에서도 앤은 샤르가 움직이면 사람들이 다시 겁을 먹을 것이라며 그를 말렸고, 에워싼 자경단원들과 스칼렛을 향해 이제 괜찮으니 제발 멈춰달라고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호소했다. 샤르는 자신이 자경단원들을 리즈를 죽인 원수로 착각했음을 깨닫고 서늘한 오한을 느끼며, 앤을 품에 안은 채 인간을 해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경단원들이 앤을 다치게 할까 봐 쉽게 손을 쓰지 못하는 대치 상황에서 스칼렛이 다가오자, 샤르는 앤의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스칼렛은 이 요정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으니 모두 물러나라고 자경단원들에게 매섭게 명령했고, 은설탕 자작의 대리인인 앤이 자신의 귀한 손님임을 강조하며 자경단을 철수시켰다.

 

정신이 몽롱해진 앤을 저택으로 급히 옮기려던 중 출혈이 심해질 것을 우려한 사이러스가 나타나 자신의 집으로 앤을 옮기자고 제안했다. 샤르는 앤을 품에 안고 사이러스의 통나무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사이러스의 아내 제인을 마주한 스칼렛은 당신에게서 남편을 빼앗긴 여자라며 씁쓸하게 읊조린 뒤 의사를 보내겠다는 말을 남기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처치를 끝내고 침대에서 눈을 뜬 앤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샤르가 무사히 곁에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으며, 샤르는 정체를 캐내려던 요정에게 닿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던 상황을 설명하며 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했다. 앤은 안정을 취하며 오두막 안을 둘러보다가 벽에 걸린 섬세한 꽃 그림에 시선이 멎었고, 그것이 사이러스가 소년 시절 꿈속에서 본 현실에 없는 환상의 꽃이자 현재 제인에게 바쳐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앤은 어머니 에마가 만든 17년 전의 설탕과자가 실존하는 꽃이 아니라 바로 이 그림을 보고 만들어진 것임을 깨닫고, 이것이 스칼렛이 느끼는 위화감을 풀 실마리라 직감했다.

 

제인이 스칼렛의 저택에서 올 심부름꾼을 마중하러 밖으로 나가자, 사이러스는 제인이 불안해할까 봐 숨겨두었던 옛날이야기를 꺼내며 에마에게도 그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앤은 스칼렛에게 설탕사과 수확 허락을 받기 위해 17년 전의 설탕과자를 재현해야 한다고 설명했으나, 사이러스는 그 과자가 자신과 스칼렛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밝히며 스칼렛이 지금 와서 그것을 원하는 이유가 겨우 장사 때문이라는 사실에 깊은 낙담과 울분을 토해냈다. 그는 스칼렛의 다정한 말들이 전부 계산된 비즈니스 수단이었으며 자신을 향한 애정 따윈 없었다고 단정 지었고, 자신이 본래 소작농의 딸이었던 스칼렛에게 모든 재산과 땅을 빼앗겼다며 비탄에 잠겼다. 앤은 스칼렛이 분명히 사이러스를 사랑하고 있으며 멀어진 상황에 화가 나 있는 것이라 변호했지만, 사이러스는 그녀가 부부의 성인 올코트 대신 친정 성인 에이워스로 상회를 세우고 자신을 화가로만 전념하게 만든 것 역시 날 위한다는 핑계로 모든 걸 빼앗아 간 행위였다고 반박하며 설탕사과 숲만큼은 되찾고 싶다는 염원을 드러냈다. 그때 빗소리를 뚫고 문이 열리며 겁에 질린 제인이 나타났고, 그 등 뒤로 어둑한 아침 하늘을 선명하게 물들일 만큼 아름답고 붉은 머리칼을 가진 스칼렛이 자신의 은설탕사를 데려가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6장 뒤틀리는 밤]

 

스칼렛이 주저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사이러스는 분노 섞인 눈초리를 보냈고, 문가에는 제인이 몸을 웅크린 채 서 있었다. 침대 위에 부상을 입고 누워 있던 앤은 자신들을 지켜준 스칼렛에게 감사를 표했고 샤르 역시 고마움을 전했다. 스칼렛은 숲 밖에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으니 앤을 옮기라고 재촉했으나, 사이러스는 설탕사과 숲을 돌려달라며 결연하게 가로막았다. 이에 스칼렛은 에이워스 상회를 세울 당시의 서류를 언급하며, 상회 대표의 반려 자리를 내던지고 제인을 택한 것은 사이러스 자신이라고 쏘아붙였다. 사이러스는 재산을 볼모로 자유를 빼앗으려는 처사라며 분노했고, 스칼렛은 재산이 탐나면 저 여자와 헤어지고 자신과 다시 결혼하라며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사이러스가 자신을 사랑한 적도 없으면서 염치없이 군다고 일갈하자, 스칼렛은 평생 사랑하는 사람 따위 없을 것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샤르의 품에 안겨 이 모습을 보던 앤은 스칼렛이 여전히 사이러스를 사랑하고 있으며, 배신감 때문에 그를 증오하고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가랑비를 맞으며 마차로 향하던 앤은 단순히 에마의 작품을 외형만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스칼렛이 갈구하는 과거의 행복을 되찾아줄 수 없으며, 이대로는 불가능한 숙제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저택 객실로 돌아온 후, 요정 미스릴 리드 포드는 앤의 부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샤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등 분노를 터뜨렸다. 미스릴은 앤을 다치게 한 책임을 물어 샤르에게 정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소란을 피웠고, 샤르는 제 행동에 후회를 느끼며 미스릴과 티격태격했다. 앤은 두 사람을 만류하며 세 사람이 무사히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미소 지었다. 이어 미스릴이 정체불명의 인물인 길버트 할퍼드와 그가 부리는 요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앤은 더 이상 과거를 파헤치느라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지금 곁에 있는 샤르와 미스릴이라는 소중한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샤르는 앤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약 기운에 취해 잠든 그녀를 다정하게 보살폈으며, 한편으로는 앤을 위험에 빠뜨린 배후의 존재에 대해 철저한 경계심을 품었다.

 

한밤중 정신을 차린 앤은 열감이 한풀 꺾인 것을 느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틀에 걸터앉아 있던 샤르와 짧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던 찰나, 아래층에서 유리가 박살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샤르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곧장 방을 나섰고 고용인 핀리와 함께 범인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불안한 마음에 계단 위에서 홀을 내려다보던 앤은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 사이로 돌덩이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고, 곧이어 열린 현관문 틈으로 제인이 칼을 쥔 채 안으로 잠입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제인은 앤을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계단을 뛰어 올라와 그녀의 목에 나이프를 들이밀며 스칼렛의 방 위치를 대라고 협박했다. 이때 복도 끝방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스칼렛이 나타났고, 앤은 목에 칼이 겨눠진 상황에서도 스칼렛에게 도망치라고 비명을 질렀다.

 

제인은 앤을 거칠게 밀쳐 바닥에 처박은 뒤 스칼렛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스칼렛은 방 안으로 피하려 했으나 제인이 문을 비집고 들어와 나이프를 치켜들었고, 두 여인은 바닥에서 뒤엉켜 필사적인 사투를 벌였다. 허리의 격통을 참으며 방으로 뛰어 들어온 앤이 제인의 팔을 붙잡고 버티던 순간, 비명을 듣고 달려온 샤르와 핀리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핀리가 제인을 제압하고 샤르가 나이프를 빼앗으면서 상황은 겨우 일단락되었다. 스칼렛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죽이려 한 제인을 살인미수로 주공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제인은 눈물을 흘리며, 재산과 힘을 가진 스칼렛으로부터 사이러스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소리쳤다. 더불어 스칼렛이 과거 타인의 이름을 빌려 매년 사이러스의 그림을 몰래 사들였던 사실을 폭로하며, 그것이 배려를 가장해 사이러스의 자존심을 짓밟고 무능력자로 길들인 잔인한 행위였다고 비난했다. 앤은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캔버스를 떠올리며 스칼렛의 비뚤어진 애정과 그로 인해 무너져 내린 사이러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스칼렛은 분노하며 제인을 처벌하려 했으나, 앤은 샤르의 팔에 의지해 일어서서 그녀를 만류했다. 앤은 제인을 주공에게 넘긴다면 사이러스가 평생 스칼렛을 증오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 지적했다. 스칼렛이 자신이 죽을 뻔했다며 분노하고 차라리 제인을 몰래 묻어버리겠다고 서슬 퍼런 협박을 가했음에도, 앤은 물러서지 않고 스칼렛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스칼렛이 정말로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7장 당신의 색]

 

앤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스칼렛을 정면으로 응시했고, 그 기세에 압도된 스칼렛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냐는 스칼렛의 질문에 앤은 담담하게 그것이 스칼렛이 바라는 일이라면 괜찮다고 답했다. 겉으로는 냉정해 보였지만 앤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으며, 스칼렛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고 설탕과자를 손에 넣어 웃을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앤은 사이러스가 절망에 빠져 제인을 찾아 헤매는 꼴을 보며 만족하든, 재산으로 그를 곁에 붙들어 두든, 혹은 마음을 비워내고 즐겁게 살아가든 선택은 스칼렛의 몫이라고 일컬었다. 앤이 읊어준 미래의 갈래들을 마주한 스칼렛의 눈동자에는 자신이 맞이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서렸다. 앤은 스칼렛이 스스로 답을 내릴 때까지 결코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고, 스칼렛이 진심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오직 자신만의 선택을 내리라고 재촉했다.

 

살갗이 저릿할 정도의 긴장감 속에서 스칼렛이 마침내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하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방 입구에 나타났다. 살벌한 공기와 붙잡혀 있는 제인을 본 하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밖에 사이러스가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밤중에 갑자기 부인이 사라져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말에 스칼렛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하녀가 물러나자 스칼렛은 제인을 붙잡고 있던 핀리에게 손을 떼라고 지시했고, 불만 가득한 표정의 핀리는 마지못해 제인을 놓아주었다. 스칼렛은 앤을 바라보며 단호한 결의가 서린 표정으로 선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윽고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사이러스가 계단을 뛰어 올라와 방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제인을 발견한 사이러스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대체 어찌 된 일이냐며 절박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앤이 제인이 스칼렛을 죽이려 칼을 겨눴다고 설명하자, 사이러스는 절망 섞인 탄성을 내뱉으며 제인을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제인이 흐느끼기 시작하자 사이러스는 땅에 미련이 남았다고 해서 당신을 버릴 리 없다며 다급하게 위로했다. 스칼렛이 제인은 당신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이라고 쏘아붙이자, 사이러스는 자신이 조상의 땅에 집착해 제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며 자책하고 스칼렛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이에 스칼렛은 말로만 하는 사과는 인정할 수 없다며 설탕 사과 숲을 깨끗이 포기하고 두 번 다시 제 앞에 나타나지 말 것을 엄숙하게 요구했다. 사이러스는 망설임 없이 약속했고, 그 단호한 태도에서 그가 땅보다 제인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음이 극명히 드러났다. 스칼렛은 이를 악물고 그들을 당장 쫓아냈고, 사이러스는 제인을 부축하며 방을 나갔다. 핀리는 가해자를 그냥 보내준 것에 분개했으나 스칼렛은 대가로 사이러스가 상회의 땅에 참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상황을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소동이 끝난 뒤 스칼렛은 진저리가 난다며 모두에게 나가 달라고 청했다. 샤르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앤도 따르려 했으나, 끝내 스칼렛이 마음에 걸려 발을 멈추고 샤르의 묵인 아래 다시 스칼렛에게 돌아갔다. 홀로 남은 스칼렛은 눈물로 젖은 눈을 한 채 선택을 내렸다고 나직이 말했고, 앤은 자신보다 키가 큰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슬픔을 보듬어주었다. 스칼렛은 주저앉아 앤의 품에서 남편에 대한 깊은 증오와 배신감을 토해냈지만, 앤은 그것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임을 이해했다. 앤은 만약 자신과 샤르에게 같은 일이 일어났더라도 쉽게 미워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스칼렛이 17년 전의 설탕과자를 소중히 간직해 온 것 역시 그 시절의 희망과 행복을 차마 부수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앤의 품속에서 스칼렛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앤은 미련을 놓아버린 스칼렛에게 최고의 행복을 선물하겠다고 다짐했다. 과거의 행복은 되살릴 수 없지만, 스칼렛 자신만의 미래를 향한 본질적인 희망을 담아낸다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앤은 스칼렛에게 완벽한 설탕과자를 만들어 장사의 적수에게 이기게 해 주겠다고 속삭였고, 스칼렛은 다시 오만한 평소의 태도로 돌아와 기대를 하겠다며 핀리를 불러 업무를 재개했다.

 

방으로 돌아온 앤은 상기된 목소리로 샤르와 미스릴을 깨워 설탕과자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잠이 덜 깬 미스릴은 17년 전과 똑같은 것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의아해했으나, 앤은 단순한 형태 재현을 넘어선 무언가를 알아냈다고 답했다. 샤르는 앤의 얇은 잠옷이 젖어 속살이 비치는 것을 지적하며 찬물을 준비하러 밖으로 나가주었고, 그사이 앤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상처의 통증이 여전함에도 앤은 은설탕에 냉수를 붓고 반죽을 치대기 시작했다. 앤이 광택을 억제한 은설탕 반죽에 색소를 듬뿍 섞자 미스릴은 병을 잘못 집었다며 기겁했지만, 앤은 틀리지 않았다며 조형에 집중했다. 앤은 반죽을 아주 얇게 밀어 정교한 꽃잎 모양을 오려내고 한 장씩 겹쳐 쌓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이어서 은설탕의 눈부신 광택을 살려 정밀한 나비 날개와 이슬을 표현하며 커다란 형상을 빚어냈다.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해가 저물어 램프를 켤 때까지 앤은 식사도 무심하게 넘기며 오직 은설탕이 이끄는 대로 작업에만 몰두했다.

 

동이 트기 전의 어스름한 새벽, 앤은 긴 한숨을 내쉬며 설탕과자 제작을 마무리지었다. 창가에 있던 샤르와 테이블 위의 미스릴이 긴장을 풀며 다가왔고, 앤은 모든 것을 비워내고 남은 본질을 형상으로 빚어냈다고 설명했다. 과자의 고운 색을 칭찬하는 샤르의 말에 힘을 얻은 앤은 벽에 걸린 벨을 당겼고,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핀리에게 스칼렛과의 교섭을 요청했다. 핀리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설탕과자, 즉 이전에 실패작이라 판정받았던 것과 방금 완성된 새 과자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본 뒤 앤을 스칼렛의 방으로 안내했다. 앤은 두 설탕과자에 보호 천을 씌워 하나는 핀리에게 맡기고 하나는 직접 들었으며, 결과가 어떻게 되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샤르와 미스릴에게 기다려 달라고 당부했다.

 

아직 어둑한 방 안에서 등불을 켜고 집무를 보던 스칼렛은 앤과 핀리가 가지고 온 두 개의 설탕과자를 보고 의아해했다. 핀리가 물러간 후 앤은 17년 전 에마 할퍼드의 작품을 재현하다 보니 두 개가 되었다고 말하며 첫 번째 설탕과자의 천을 벗겼다. 스칼렛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완벽에 가깝게 닮았지만 무언가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에 앤은 형태가 같아도 어릴 적 소중히 여기던 조약돌을 어른이 되어 다시 볼 때처럼 당시의 감정까지 되살아나지는 않기 때문에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이어 앤이 두 번째 설탕과자의 천을 걷어내자 스칼렛은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다며 감탄했다. 그 과자는 형태는 같았으나 빛을 머금고 타오르는 듯한 진홍색 꽃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앤은 17년 전 설탕과자의 본질이 미래를 향한 희망이었음을 짚어내며, 붉은색이야말로 스칼렛이 거머쥘 미래의 색이자 그녀에게 어울리는 희망이라고 설명했다. 스칼렛은 앤의 말을 궤변이라 부르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앤은 그것이 진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교섭의 성패와 상관없이 장인으로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한참을 웃던 스칼렛은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사이러스가 누구에게나 동정심을 베푸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자신은 그의 맑은 모습을 지켜주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드센 자신에게서 사이러스가 떠날까 봐 두려운 나머지 그의 재산을 상회 명의로 묶어두는 치졸한 짓을 저질렀다고 자조했다. 그녀는 5,6년 전 몰골이 상해 돌아온 제인을 사이러스가 돕다가 결국 사랑하게 된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대신 지금을 받아들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스칼렛은 자신이 앤의 과자를 보고 17년 전처럼 아름답다고 말해버렸다며 교섭이 성공했음을 선언했다. 그녀는 은설탕 자작에게 설탕 사과 수확 계약을 체결하라는 절차를 밟으라 전하게 했고, 진홍빛 과자는 자신이 갖는 대신 파란 꽃의 첫 번째 과자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어렵게 사는 무명 화가 부부에게 전해주라고 앤에게 맡겼다. 앤은 미련을 베어내고 타인에게 축복을 베푸는 스칼렛의 강인함에 감동하여 그녀가 좋다고 고백했고, 스칼렛은 고마움을 표하며 앤을 대등한 장인이자 파트너로 인정하는 악수를 청했다.

 

방을 나선 앤은 복도에서 기다리던 핀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고, 스칼렛의 깊은 속내를 헤아리던 핀리는 날이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방 안으로 불려 들어갔다. 아침놀이 퍼지는 복도를 지나 방으로 돌아온 앤은 샤르와 미스릴을 마주했다. 스칼렛의 조언대로 소중한 사람에게 솔직해져야겠다고 다짐한 앤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샤르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앤의 태도에 샤르는 당황하면서도 앤을 다정하게 마주 안아주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속삭였다. 샤르는 앤의 품에서 따스함을 느끼며, 자신이 앤을 지키는 줄만 알았으나 오히려 가냘펐던 소녀가 강인하게 성장하여 자신을 몇 번이고 구원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앤은 숲속 작은 집에 사는 화가 사이러스와 그의 아내 제인을 찾아가 푸른 꽃의 설탕과자를 전달했다. 부부가 영문을 몰라 하자 앤은 이 과자를 전하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이지만,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은 따로 있다며 스칼렛의 이름을 밝혔다. 화가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고, 아무런 글귀도 적혀 있지 않은 설탕과자는 그 자체로 부부의 행복을 빌어주는 스칼렛의 분명한 메시지가 되어 전해졌다.

 

루이스턴 교외의 작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앤의 상처는 꽤 아물어 있었다. 미스릴은 그리운 집에 도착하자마자 기뻐하며 현관으로 달렸고, 돌아오는 내내 앤을 배려해 직접 마차를 몰았던 샤르는 손을 내밀어 앤이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무사히 돌아온 평온함도 잠시, 문틈에 끼워져 있던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미스릴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아 펼친 앤은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편지에는 앤이 보고 싶어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해 글을 남기며, 현재 록웰 주의 코셀에 머물고 있으니 만나러 와 달라는 길버트 할퍼드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편지를 가로챈 샤르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졌고, 그가 집 위치까지 알아내어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에 날카로운 분노를 터뜨렸다. 더는 방관할 수 없다는 샤르의 나직한 다짐과 함께, 바람이 설탕 사과 나무의 가지들을 소란스럽게 흔들며 머지않아 다가올 수확의 계절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