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버스]
샤르 펜 샤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목소리를 느끼며 희미했던 의식을 점차 회복해 갔다. 마치 태어나기 전의 캄캄한 공간을 떠도는 듯한 감각 속에서 의식이 또렷해지던 찰나, 누군가 옆구리를 거칠게 걷어차는 바람에 끔찍한 고통과 함께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축축한 강가였고, 그의 앞에는 거친 사내 데릭과 마르고 유약해 보이는 소년 카시가 서 있었다. 깊은 상처로 인해 생명의 근원인 은빛을 흘리던 샤르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최악의 몸 상태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카시는 겁에 질린 야생동물을 달래듯 부드럽게 다가왔지만, 데릭은 카시를 밀쳐내고 샤르의 멱살을 잡으며 짝날개의 행방을 추궁했다.
그 순간 샤르는 자신의 등에 날개가 단 한 장뿐이라는 사실과 함께,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거대한 혼란에 직면했다. 데릭이 목숨과 다름없는 날개를 내놓으라며 사정없이 흔들자 샤르는 인간을 향한 깊은 분노를 느꼈다. 이때 카시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데릭에게 몸통 박치기를 감행해 그를 쓰러뜨렸다. 카시는 데릭의 기세에 벌벌 떨면서도 상처 입은 이를 이대로 두면 죽어버릴 것이라며 치료부터 하자고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결국 데릭은 툴툴거리며 물러섰다. 카시가 부축하려 다가오자 샤르는 인간에 대한 강렬한 혐오감으로 거부했으나, 문득 인간과 요정 모두 좋은 자와 나쁜 자가 있다는 기억 속 목소리를 떠올리며 적의를 가라앉혔다. 결국 생존을 위해 몸을 회복할 때까지 기회를 엿보자고 다짐한 샤르는 카시의 부축을 받아 그들의 거처로 향했다.
한 달 동안 샤르는 숲속 폐가인 장작 창고에서 형제와 함께 지냈다. 형제는 북쪽의 가난한 마을 출신으로, 겨울이 오기 전에 요정인 샤르를 치료해 비싼 값에 팔아넘길 계획이었다. 카시는 매일 아침 수프를 챙겨주며 날개의 행방을 물었지만, 샤르가 모른다고 답하면 순순히 물러나곤 했다. 샤르는 체력이 회복되면 도망칠 생각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잃어버린 날개에 대한 불안감이 없었고 오히려 가슴 깊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환청으로 인해 애달픈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카시는 샤르가 수프 그릇을 떨어뜨리자 자신이 멍청해서 맛없는 음식을 주었다며 자책하며 기가 죽었다. 그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낀 샤르가 카시는 멍청이가 아니라 순수하고 좋은 인간이라고 위로해 주던 중,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데릭이 카시의 눈이 붉어진 것을 보고 오해하여 샤르의 멱살을 쥐었다. 하지만 카시의 설명을 들은 데릭은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고, 샤르는 이들이 돈을 바라고 자신을 주웠으나 정작 잔인하게 굴지 못하는 어설프고 선량한 인간들임을 깨닫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때 장작 창고 밖으로 인근 로이드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몰려와 집세를 내라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돈을 내지 못할 거라면 얼마 전 주웠다는 요정을 대신 넘기라고 요구했고, 그들이 요정을 가져가 막 굴리겠다는 잔혹한 속내를 드러내자 샤르는 깊은 혐오감을 느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데릭이 요정을 넘겨줄 수 없다며 맞서던 중, 샤르가 마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샤르의 아름다운 용모에 압도되었고, 샤르가 오른손에 의식을 집중해 은빛 알갱이들로 날카로운 검을 형상화하자 장내는 순식간에 공포로 뒤덮였다. 데릭은 샤르가 전사 요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샤르가 전사 요정의 기세를 뿜어내며 검을 겨누자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앞다투어 숲속으로 도망쳤다. 상황이 정리된 후, 샤르는 검을 다시 빛으로 되돌린 뒤 어리둥절해하는 형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쪽 날개가 없는 전사 요정은 위험해서 팔지 못할 테니, 체력을 회복하고 돌아갈 곳을 찾을 때까지 자신을 먹여 살려주는 대가로 형제의 호위가 되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데릭은 어이없어하다가 이내 배를 움켜쥐고 크게 웃으며, 자신들이 정말 엄청난 물건을 주웠다며 카시와 함께 기뻐했다.
샤르는 매일 밤 꿈속에서 얼굴이 선명하지 않은 누군가를 품에 안았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그 가냘픈 몸을 어루만지며 손끝에 입을 맞출 때마다 애틋한 충동이 솟구쳤지만,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카시는 그 꿈속의 상대가 분명 샤르에게 소중한 사람일 것이라며 진지하게 위로했고, 데릭은 짓궂게 웃으면서도 하루빨리 기억을 찾기를 바란다며 격려해 주었다. 상냥한 형제 덕분에 샤르는 무사히 겨울을 넘길 수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 데릭과 함께 사냥한 짐승의 절반을 마을에 팔아 방한복과 기름 등 월동 자재를 구했고, 남은 절반은 카시가 육포로 만들어 보존식을 마련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겨울 내내 데릭은 로이드 마을 녀석들이 자신들을 곱게 보지 않는다며, 내년 겨울에는 사우스 세인트 항구에 있는 지인을 찾아가 하역 일을 하며 지낼 만한 다른 곳을 알아보자고 제안했다. 추위를 느끼지 못해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 장작불을 바라보던 샤르는 그들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윽고 살을 에는 냉기가 가시고 풀꽃이 피어나는 봄이 찾아왔다. 샤르는 눈이 녹아 질척이는 숲길을 걸으며 신나게 식용 새싹을 뜯고 들꽃을 허리띠에 꽂는 카시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잃어버린 한쪽 날개와 기억을 반드시 되찾아야 했지만, 마음이 평온했던 샤르는 이 좋은 인간들과 이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때때로 머릿속을 맴돌며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가슴속이 뜨거워지며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이 왈칵 솟구쳤다. 그러던 중 숲 너머에서 누군가를 위협하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드 마을 사람들이 홀로 강가 숲속에 사는 테드 영감을 둘러싸고 무언가를 강탈하려 하고 있었다. 카시는 테드 영감이 과거 자신들에게 약을 발라주고 떫은 사과를 주었던 은인이라며 도와달라고 샤르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테드 영감은 후드를 눌러쓴 장신의 인물을 제 등 뒤로 감싸며 15년 전 내란 때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의 아들 대럴이 살아 돌아온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공동 곡물 창고를 보수할 돈이 필요하다며 영감이 주운 자를 마을 공동 재산으로 넘기라고 윽박질렀다. 거듭되는 협박에 테드 영감이 물러서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주먹을 쥐었고, 그 순간 망토를 두른 인물 주변에서 소름 끼치도록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예감을 감지한 샤르는 지금의 평온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샤르는 오른 손바닥에 은빛 광채를 모아 검을 벼려내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떠돌이 형제의 집에 있는 요정이 나타나자 공포에 질려 안색이 창백해졌다. 샤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물러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경고하자, 마을 사람들은 카시를 증오스럽게 노려보며 수군거리며 물러났다. 샤르는 검을 빛의 입자로 되돌리며 돈이 얽힌 인간들이 조만간 또 다른 수작을 부릴 것이라 직감했다. 그때 망토를 쓴 인물이 후드를 살짝 들고 샤르에게 목례를 건넸는데, 매혹적인 용모의 틈새로 날개 끝이 보였다. 샤르는 그가 높은 전투 능력을 지닌 요정임을 알아챘고 어딘가 낯이 익다는 위화감을 느꼈다. 테드 영감은 카시에게 이 요정 역시 강 상류에서 떠내려온 것을 구해주었다고 털어놓았다.
샤르는 자신과 똑같은 시기에 같은 강에서 떠내려온 요정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지만, 그 요정은 상처가 심해 기억이 없다며 테드 영감을 수줍게 자신의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샤르에게 카시는 다들 외로워서 소중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에 샤르의 가슴이 다시 한번 욱신거렸고,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외로움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르는 자신의 불안을 다정하게 토닥여주는 카시를 보며 샤르 자신 역시 운이 좋은 괜찮은 요정이라 생각했고, 이 기묘할 정도로 과분한 행운의 연속 뒤에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억지로 행운을 쥐여주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거금을 노리는 끈질긴 마을 농민들이 순순히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예견하고 데릭이 사우스 세인트로 편지를 보냈는지 확인한 뒤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후 카시는 종종 영감의 오두막을 살피며 선물을 받아오곤 했고, 시간은 여름을 지나 숲이 붉고 노랗게 물드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머릿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비정상적으로 잦아져 샤르는 안절부절못하며 숲속을 헤맸다. 거센 바람에 낙엽 소용돌이가 치는 숲을 걷던 중, 떡갈나무 밑동에 주저앉아 있던 데릭이 다가와 카시가 걱정하고 있다며 말을 건넸다. 데릭은 기억을 못 찾아도 좋으니 옛날 일은 괘념치 말고 여기서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진지하게 설득하며, 어릴 때부터 굼 떠서 괴롭힘을 당하던 동생 카시를 자신이 평생 지켜주기로 다짐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샤르는 나를 부르는 소중한 이의 목소리가 외로움에 떨고 있어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답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유독 초조함을 부추기는 이유를 의아해하던 바로 그 순간, 샤르는 숲속에 아스라이 배어 있는 익숙하고 달콤한 향기를 맡아냈다.
그때 숲을 가르는 카시의 비명이 들려왔고, 샤르와 데릭은 지체 없이 장작 오두막으로 내달렸다. 오두막은 이미 주황빛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로이드 마을 작자들이 고용한 요정 사냥꾼 세 명이 말을 탄 채 카시를 에워싸고 위협하고 있었다. 샤르는 오른손에 은빛 칼날을 벼려내며 뛰쳐나가 사냥꾼들의 말 발목을 얕게 베어 그들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데릭 역시 녹슨 검 손잡이로 사냥꾼 두 명을 내리쳐 기절시켰다. 샤르가 남은 한 명의 목덜미에 검을 겨누고 추궁하자, 사냥꾼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다른 일당이 테드 영감네 오두막에 있는 요정을 잡으러 갔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샤르는 사냥꾼을 걷어차 기절시킨 뒤 동족의 처지가 자신과 너무나 똑같다는 생각에 그들을 구하기 위해 강 하류의 지름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데릭과 카시도 그 뒤를 쫓았다.
숲을 내달릴수록 매캐한 탄내는 가시고 꿈속에서 나던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으며, 머릿속에서는 샤르를 부르는 목소리가 숨이 막힐 정도로 또렷해졌다. 마음에 일어나는 격렬한 들끓음을 억누르며 짐승 길을 빠져나온 순간, 하얀 줄기와 가지에 새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열린 설탕사과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렬한 달콤한 향기가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자 깊이 잠들어 있던 모든 기억의 빗장이 순식간에 풀렸다. 샤르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숙이며 가슴을 끌어안았고, 머릿속으로 거대한 해일처럼 되살아나는 기억 속에서 앤이라는 이름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가을이 되자 자신을 뒤흔들었던 것은 은설탕사들이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며 거대한 규모로 만든 설탕과자의 축복이자, 연인인 앤이 샤르를 위해 간절히 빚어낸 행운의 파편이었다. 그 축복 덕분에 추락 속에서도 목숨을 건지고 선량한 형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기억이 살아나자 샤르는 실소를 멈추고 굳어버렸다. 테드 영감의 아들 행세를 하던 요정의 정체는 바로 자신의 숙적 라팔이었다. 라팔 역시 기억을 잃고 백지상태가 되었기에 인간과 온화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샤르는 라팔이 과거를 떠올려 다시 끔찍한 재앙의 씨앗이 되기 전에 숨통을 끊어놓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뒤쫓아온 데릭과 카시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차갑게 경고한 뒤 홀로 질주했다. 가을바람을 가르며 도착한 테드 영감의 오두막은 고요했다. 샤르가 손에 은빛 검을 쥔 채 다가가자, 물통을 들고 문 밖으로 나온 라팔이 의아한 눈으로 경계 없이 샤르를 바라보았다. 오두막에서 고개를 내민 테드 영감이 샤르의 검을 보고 바짝 경계하자, 라팔은 영감을 제 등 뒤로 숨기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요정의 치명적인 약점인 날개를 무방비하게 노출한 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인간 아버지를 지키려는 라팔의 모습은 과거의 잔혹한 요정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질적이었다. 순백의 상태로 새로 태어나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한 라팔을 보며 샤르는 검을 꽉 쥐었지만, 무기도 없이 인간을 감싸 안은 그를 도저히 베어버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샤르는 언젠가 라팔이 기억을 되찾았을 때 늙은 노인과의 유대가 과거의 망령을 이겨내기를 바라며 이번 한 번은 행운을 걸어보기로 했다. 샤르는 검을 거두고 요정 사냥꾼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테니 북쪽 빌세스 산맥 근처로 도망치라고 낮게 경고했다. 때마침 뒤쫓아온 데릭과 카시 역시 마을 놈들의 수작을 피하려면 당장 떠나야 한다며 테드 영감과 라팔을 오두막 안으로 들여보내 짐을 챙기게 했다.
사우스 세인트로 떠날 채비를 마친 네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샤르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돌아갈 곳과 소중한 사람을 기억해 냈다는 샤르의 말에 카시는 낙담하면서도 눈물을 훔쳤고, 데릭은 기뻐할 일이라며 씩 웃어 보였다. 샤르는 자신과 동료가 되어주었던 형제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며 소중한 사람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고했다. 카시는 울먹이는 미소로 소중한 사람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며 힘차게 돌아섰고, 네 사람은 숲 안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자취를 감추기 직전 카시와 데릭, 그리고 라팔이 샤르에게 마지막 목례와 시선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로이드 마을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샤르는 눈을 감고 다가오는 요정 사냥꾼이 단 두 명임을 가늠한 뒤, 눈을 뜨고 검을 고쳐 쥐었다. 카시와 데릭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고, 라팔 또한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 노인과 서로를 돌보며 살아갈 터였다. 설탕사과의 달콤한 향기가 주위를 감싸는 가운데, 샤르는 이 사냥꾼들만 쓰러뜨리고 1년 동안 자신을 간절히 기다려 준 연인 앤의 곁으로 돌아가 질리도록 끌어안아 주겠다고 다짐했다. 앤의 부름에 곧 돌아가겠다고 속으로 화답한 샤르는 박차고 나갔고, 그의 한쪽 날개가 가을 햇살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또 한 명의 앤 할퍼드]
루이스턴에 자리한 파웰 할퍼드 공방은 지난겨울 문을 연 이후 단숨에 일대에서 손꼽히는 인기 설탕과자점이 되었다. 은설탕 자작의 아들인 키스 파웰은 자신이 예전에 가르쳤던 다섯 명의 요정을 견습생으로 두고 본격적으로 공방 일에 매진했다. 어느 깊어가는 가을날 점심시간, 키스는 안뜰 구석에 놓인 미완성 간판에 새겨진 할퍼드라는 이름을 바라보며 앤 할퍼드를 떠올렸다. 지난 1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샤르를 기다리며 깊은 절망에 잠겨 있던 앤은 마침내 샤르가 돌아오자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되찾은 상태였다. 키스는 샤르가 돌아온 것에 진심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계적인 대량 주문을 처리해야 하는 이 바쁜 공방에서 앤이 함께 일을 꾸려나가는 것이 과연 그녀에게 옳은 일일지 남몰래 고민했다.
그때 한 견습생 요정이 다급히 찾아와 가게에 다짜고짜 자신을 앤 할퍼드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했다. 매장으로 나간 키스는 카운터 너머에서 흑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대여섯 살 정도의 조그만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헐렁하고 다해진 옷을 입은 아이는 자신이 바로 여자아이 은설탕사 앤 할퍼드라며 당당하게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키스는 아이가 유명한 은설탕사의 이름을 사칭해 일자리를 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자세히 보니 가을날인데도 양말도 없이 맨발로 나막신을 신었고 옷에 때가 타 있었기에, 키스는 아이의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는 병으로 누워 있어 생계가 무척 곤란한 처지임을 직감했다. 키스는 아이의 절박한 사정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어머니의 허락 서명을 받아오면 잔심부름꾼으로 고용하겠다는 내용의 메모를 적어 건넸다. 아이는 크게 기뻐하며 편지를 품에 안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날 저녁 정말로 어머니의 서명을 받아온 아이는 다음 날부터 공방의 잔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되었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자신을 앤이라고 불러 달라고 우겨 결국 공방 사람들도 아이를 앤이라 부르게 되었다. 얼마 뒤, 진짜 앤 할퍼드가 물방울 요정 미스릴 리드 포드와 함께 공방 안뜰로 들어섰다. 샤르가 돌아온 이후 눈부시게 밝은 미소를 되찾은 앤은 이제 공동 경영자로서 내일부터 매일 공방으로 출근해 밀려드는 주문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키스는 현재 밀려 있는 주문이 스물다섯 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환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앤은 매 작품마다 온 마음을 담아 고유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장인이었기에, 대량의 상업용 주문을 기계적으로 쳐내야 하는 공방의 틀에 그녀를 밀어 넣는 것이 그녀의 색깔을 죽이는 행동이 아닐까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대화 도중 키스는 공방에 또 다른 앤 할퍼드라는 아이를 고용했다는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이름이 겹쳐 혼란스러울 것을 걱정한 앤이 자신이 별명으로 불리겠다고 제안하자, 미스릴은 사과 양이라는 엉뚱한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때 도구 정리를 마친 꼬마 앤이 밖으로 달려 나와 진짜 앤을 마주했다. 아이는 앤이 여자 설탕과자 장인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진짜 앤 할퍼드 같다고 감탄했다. 꼬마 앤이 은설탕 반죽을 보여달라고 조르자, 앤은 즐거운 기분으로 아이의 손에 이끌려 작업장으로 향했다. 아이가 당당하게 자신을 앤 할퍼드라고 소개하자 앤은 멋쩍어하며 자신의 이름이 사과 언니라고 대답했다. 작업대에 선 앤은 우아하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은설탕을 반죽하기 시작했고, 꼬마 앤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은설탕이 예뻐서 좋다는 아이의 순수한 대답에 앤은 화사하게 미소 지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스는 저 아름다운 미소가 결국 영원히 샤르의 것이라는 씁쓸함을 느끼며 가슴 아파했다.
다음 날부터 앤은 공방에 출근해 키스의 지시에 맞춰 성실하게 일감을 소화해 나갔다. 그러나 앤은 바쁜 와중에도 꼬마 앤에게 은설탕 반죽을 보여주거나 작은 설탕과자를 만들어 줄 때 가장 즐거워 보였다. 점심시간에 장부를 정리하던 키스는 우물가에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듯 은설탕을 만지며 미소 짓는 앤을 내려다보았다. 키스는 앤이 공방이라는 족쇄에 얽매여 행복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도, 공방이라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앤과의 인연마저 끝날까 봐 두려워하는 자신의 이기적인 미련에 괴로워했다. 그때 꼬마 앤이 점심을 먹지 않은 키스를 위해 수프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멍하니 이마를 짚고 있던 키스를 바라보던 아이는 오늘 아침 자신의 어머니도 그렇게 웃었다며, 웃고는 있지만 보고 있으면 슬퍼지는 그 표정이 정말 싫다고 나직하게 말했다.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감추고 싶은 슬픈 속마음을 들킨 키스는 큰 충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병든 어머니 앞에서도 내색 없이 씩씩하게 일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자책을 멈추고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키스는 자신의 어지러운 감정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안뜰의 앤을 다시 한번 바라본 뒤 아이가 가져다준 따뜻한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앤은 이른 아침부터 작업대에 앉아 주문받은 쌍두마차 모양의 설탕과자를 다듬고 있었다. 이미 이틀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작업에 매달린 앤의 안색은 몹시 파리했다. 작업장에 들어선 키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앤을 나무랐고, 곁의 스툴 위에서는 함께 밤을 새운 요정 미스릴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키스의 눈에는 말의 세밀한 털 결이나 마차의 매끄러운 광택, 입체적인 금빛과 은빛의 덩굴 조각까지 완벽해 보였으나, 앤은 오늘 오전까지 손을 더 보아야 한다며 완성을 미루었다. 키스는 나중에 샤르에게 겪을 닦달을 걱정하면서도 완강하고 진지한 앤의 태도에 결국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부엌문이 열리며 허드렛일을 돕는 꼬마 앤이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꼬마 앤은 작업장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더니 시선을 굴리다가 무뚝뚝한 태도로 급히 자취를 감추었다. 키스는 앤에게 정오까지는 납품을 마쳐야 한다고 당부했고, 앤은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잠에서 깬 미스릴이 일손을 도왔으나 정오를 알리는 성 루이스턴 벨 교회의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앤은 초조하게 수정을 거듭했다. 결국 아쉬움의 한숨을 삼킨 앤이 완성을 선언하자 대기하던 다섯 명의 은설탕 요정 견습생들이 설탕과자를 포장해 루이스턴에 있는 의뢰인에게 배달하러 출발했다.
앤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풀이 죽은 채 부엌 식탁에 엎드렸고, 키스는 그런 앤의 곁에 다가가 위로했다. 앤이 스스로 납득할 만한 형태를 구축하지 못해 괴로워하자, 키스는 앤이 주문자의 마음과 목적, 의뢰인의 인품까지 깊이 이해해야만 만족하는 장인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공방의 대량 주문 방식에 맞지 않는 앤의 성향을 보며 키스는 그녀가 공방을 떠나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뇌했다. 바로 그 순간 미스릴이 작업장 문을 쾅 열고 들어와 미스릴이 직접 만들어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빨간색 유색 은설탕 단지를 도둑맞았다고 소리쳤다.
작업장에는 낯선 이가 오지 않았기에 미스릴은 아침부터 짐을 들고 뻔질나게 드나들던 꼬마 앤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견습생들이 공방 어디에도 꼬마 앤이 없다고 보고하자 키스는 배신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며 카운터 서랍에서 아이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꺼냈다. 편지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키스는 앤, 미스릴과 함께 성벽 근처의 치안이 나쁜 번화가 골목으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사람이 살기 힘들어 보이는 판자벽으로 된 좁은 창고 같은 오두막이었는데, 앤은 문가에서 은설탕의 달콤한 향기를 맡아냈다.
키스가 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찾자 옆 술집의 여인이 나타나 오두막에 살던 아이의 어머니가 어젯밤에 사망해 공동묘지로 실려 갔으며 아이는 사라졌다고 알려주었다. 앤은 어머니를 잃은 아이의 슬픔을 자신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가 안에 숨어 있음을 확신하고 문을 열려고 애썼다. 안에서 잠긴 문 아래의 틈새로 미스릴이 기어 들어가 자물쇠를 풀었고, 문이 열리자 어둠 속 침대 곁에 웅크린 검은 머리의 작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아이 옆에는 공방에서 가져와 바닥에 끈적하게 흩뿌려진 붉은 은설탕 단지와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아이는 처벌을 두려워하며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흘렸고, 죽은 엄마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행운을 부르는 설탕과자가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앤 할퍼드라고 거짓말을 해두었기에 솔직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지 못하고 직접 만들 생각으로 설탕을 훔쳤다는 아이의 말에 키스는 아이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키스는 설탕과자에는 죽은 이를 살리는 마법 같은 힘이 없다고 부드럽게 타일렀으며, 진짜 앤 할퍼드 역시 자신이 은설탕사임을 밝히며 아이를 위로했다. 앤은 사별의 슬픔 속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지워지지 않는 유대가 남아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속삭였다.
키스는 탈진한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고, 앤은 은설탕 통을 챙겨 함께 공방으로 향했다. 키스는 아이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다시 보며, 동정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책임을 다해 아이를 돌보겠다고 다짐했다. 동시에 앤이 공방을 떠나 손님과 직접 마주하는 장인이 되어야 함을 인정하고, 공간이 달라져도 자신들의 유대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며 앤에게 공방에 얽매이지 말고 독립하라고 권유했다. 앤 역시 이에 공감하며 자신의 방식을 지켜나가겠다고 답했고, 안겨 가던 아이는 스스로 걷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진짜 이름이 미리암이고 성은 없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앤은 미리암에게 자신의 성인 '할퍼드'를 쓰자고 제안했고 미리암은 이를 수락했다. 미리암 할퍼드가 된 아이와 함께 공방에 도착하자 견습생들이 '파월 할퍼드 공방'이라는 새 간판을 걸고 있었다. 키스는 간판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며 나중에 미리암이 장인이 되면 공방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공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미리암이 불안해하자 키스는 내일 어머니의 묘를 찾아 근사한 설탕과자를 바치자고 말하며 어머니의 편지를 건넸다. 미리암이 편지를 가슴에 소중히 품자, 키스는 아이의 머리를 토닥이며 오늘부터는 이곳에 들어올 때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면 된다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자작에게 바치는 푸른 장미]
은설탕사 알프 힝글리는 해 저무는 항구도시 사우스 세인트 길거리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얇은 옷차림의 그는 입을 떡 벌린 채 짐마차 곁에 우두커니 멈춰 있었고, 짐칸에는 은설탕 통과 제작 도구가 어지럽게 실려 있어 영락없는 야반도주용 짐처럼 보였다. 캣의 정수리에 엎드려 있던 초록색 머리의 요정 벤자민이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기운을 차리라고 다독이자, 캣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신음하듯 물었다. 작년 가을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의 지시로 왕도에 모여 설탕과자를 만든 이래, 캣은 요정들을 견습생으로 파견하고 지도하는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봄에 한 번이라도 가게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연인을 기다리며 시름시름 앓던 앤이 걱정되어 루이스턴 근교를 떠나지 못했다. 다행히 샤르가 무사히 귀환하면서 캣은 위경련 같은 걱정에서 해방되었고, 1년 가까이 방치해 둔 사우스 세인트의 가게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가게는 이미 모자 가게로 변해 있었다. 집주인은 1년 동안 월세를 체납한 캣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은설탕 자작에게 편지를 보냈고, 자작으로부터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는 답장을 받아 가재도구를 헛간에 처박아 둔 것이었다. 밀린 월세를 모두 주느라 캣의 수중에는 동전 몇 닢밖에 남지 않았다. 캣은 함께 요정들을 지도했던 키스 파웰도 자신과 같은 꼴이 되었을까 걱정했으나, 벤자민은 키스가 이미 자신의 공방을 본격적으로 꾸려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캣은 자신을 일터로 끌어들이고 방출 증명서로 협박했던 휴 머큐리를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주먹을 떨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너무 심한 책임 전가라며 한탄하는 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캣은 짐마차 짐칸에 등을 찧었고, 붉게 물든 거리 위로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가 호위인 청년 살림을 대동한 채 서 있었다. 캣은 휴의 옷깃을 틀어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휴는 연락도 없이 월세를 밀린 칠칠치 못한 성격을 서늘하게 꾸짖으며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라고 응수했다. 말문이 막힌 캣은 허세를 부리며 멱살을 놓고 마부석에 올라타 노숙이라도 하겠다고 툭 내뱉었다. 휴는 빈털터리 노숙자가 밤이슬을 맞았다간 밤도둑에게 당해 경비대원들에게 민폐를 끼칠 것이라며, 어른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100크레스짜리 설탕과자 제작 의뢰를 제안했다. 새 가게를 얻을 계약금이 절실했던 캣은 벤자민을 굶기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의뢰를 수락했다. 다음 날 아침, 캣은 휴의 마차를 따라 사우스 세인트를 벗어나 북쪽으로 향했다. 해가 저물 무렵 도착한 곳은 왕도와 홀리리프 성이 멀찍이 내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의 국교회 교회였다. 휴가 손에 든 열쇠로 교회 문을 열자 캣은 그가 왜 열쇠를 가졌는지 의아해했고, 휴는 작년에 은설탕 소멸 위기를 막은 포상으로 국왕에게 청해 이 교회를 개인 소유로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훗날 이 교회 묘지에 묻힐 생각이라며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라고 자조하듯 웃었다. 휴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캣에게 건네고, 편지를 읽은 캣은 머릿속에 섬세하고 화사한 설탕과자의 조형을 떠올리며 의욕을 지폈다.
두 사람은 예배당 뒤편의 생활 공간으로 도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짐을 모두 나른 캣은 호위인 살림이 보이지 않자 의아해했고, 벤자민은 살림이 도착하자마자 뒤쪽 묘지로 갔다고 알려주었다. 묘지로 향한 캣은 세 개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붉은 열매로 장식된 덩굴 화환을 바친 채 기도하는 살림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이교도인 살림이 국교회 묘지에 무릎을 꿇은 모습에 의문을 품고 다가가려 하자, 휴가 나타나 그를 제지하며 조용히 교회 앞쪽으로 데려갔다. 휴는 그 무덤이 살림의 가족들의 것이라고 말하며,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느 교회에서도 묘를 쓰게 해주지 않아 자신의 교회가 된 이참에 묻히게 해주었다고 털어놓았다. 캣은 휴가 살림을 처음 만난 계기를 물었고, 휴는 과거 파벌에서 쫓겨난 전임 수장의 아들이 보낸 암살자가 바로 살림이었으며 잠든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게 첫 만남이었다고 밝혔다. 살림은 밀항 직후 어머니와 동생을 잃고 아버지마저 쇠약해져 암살자 일을 선택했으나, 휴가 더 좋은 일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손을 멈추었던 것이었다. 고아로 자라 여동생을 잃었던 휴는 이교도에게 무덤조차 허락하지 않는 현실이 이상하다며 쓸쓸히 미소 지었고, 10년 후의 날을 위해 이곳이 좋은 곳이라 중얼거렸다.
밤이 깊어지자 캣은 실내에 촛불을 밝히고 은설탕을 치대기 시작했다. 옆방에는 휴가 잠들어 있었고 살림은 밤늦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캣이 작업을 이어가던 중 벤자민은 휴 자작이 요정들의 묘비도 만들어줄 좋은 사람이라 말했고, 캣은 휴가 낮에 언급했던 10년 뒤라는 말이 자꾸 불길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때 얼굴을 내민 살림에게 벤자민이 자작이 죽을 예정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살림은 우울한 표정으로 10년 뒤라는 말을 들었다면 더 보탤 말이 없다며 부엌으로 떠났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불안에 휩싸인 캣은 휴의 방으로 가기 위해 어두운 복도를 달리다 구석에 놓인 물건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것은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가 여기 잠들다라는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묘비였다. 충격을 받은 캣은 묘비 앞에 주저앉았고, 소중한 사람들이 늘 예고 없이 사라졌던 기억이 떠올라 끝내 눈물을 흘렸다. 캣은 설탕과자를 지켜낸 휴의 노고를 신도 수호성인도 치하하려 하지 않는 현실에 분통을 터뜨리며, 자신이라도 그를 칭찬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다시 작업대로 돌아와 윤기 나는 파란색 은설탕을 얇게 빚어 겹겹이 피어난 화려한 푸른 장미꽃 한 송이를 완성했다. 푸른 장미는 하이랜드 왕국에서 마당히 존경받아야 할 자에게 바치는 고백의 의미였다.
날이 밝자마자 캣은 휴의 방 문을 두드려 풀어헤쳐진 셔츠 차림의 휴에게 푸른 장미 설탕과자를 불쑥 내밀었다. 깜짝 놀란 휴는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주 잘 만들었다며 고맙다고 미소 지었다. 캣은 왜 숨기려 드냐며 멱살을 쥐고 병에 걸렸으면 약부터 찾지 왜 10년 뒤에 죽을 묘비부터 준비하느냐고 울부짖었다. 잠시 눈을 끔벅이던 휴는 황당하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고, 캣을 데리고 복도의 묘비 앞으로 가 이름 밑에 새겨진 연호를 보여주었다. 휴는 10년 뒤 바로 이날 병으로 급사한 것으로 위장할 계획이라고 털어놓았다. 은설탕 자작으로서 너무 많은 업적을 세워 절대적인 신뢰를 받게 된 휴는, 자신이 진짜 죽고 난 뒤 과거의 지도자를 맹신하느라 생길 파벌 간의 알력 다툼과 분란을 염려하고 있었다. 10년 정도면 요정 파견 시스템이 안정을 찾을 테니, 국왕의 사직 불허를 피하기 위해 죽음으로 위장한 뒤 등 뒤에서 차기 자작을 돕겠다는 소중히 지켜낸 설탕과자를 위한 바보 같은 계획이었다. 계획대로라면 평생 결혼도 못 한다는 캣의 외침에 휴는 자신의 장례식을 구경할 특전이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캣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장미를 빼앗으려 버둥거렸다. 그로부터 10년 뒤 은설탕 자작은 병으로 급사했고 살림은 국교회에 귀의해 그 언덕 위 교회를 지켰다. 새로 은설탕 자작이 된 엘리엇과 키스, 그리고 앤과 훗날 자작의 조언자가 된 캣은 자주 이 교회를 찾았으며, 그곳에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설탕과자를 만드는 정체불명의 관리인이 살아가고 있었다.

[앤과 첫 번째 손님]
어느 날 은설탕 자작과 페이지 공방의 엘리엇, 독립한 장인 올란드와 브리짓, 요정 노아, 그리고 키스 파웰과 조나스 앤더, 스텔라 녹스, 존 킬레인 등 은설탕사 앤 할퍼드와 연관된 수많은 사람에게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편지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심지어 하이랜드 국왕 부부에게까지 전해졌으나 시종의 의심으로 파기되었고, 알프 힝글리에게 보내진 편지 역시 주소 불명으로 배달원이 처분했다.
그 무렵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작은 집 안에서 앤은 작업대에 매달려 열심히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정원에서는 요정 미스릴 리드 포드가 콧노래를 부르며 올해 마지막으로 수확한 설탕 사과를 맷돌로 빻아 보석처럼 아름다운 은설탕을 정제하는 중이었다. 앤이 글씨를 빼곡하게 채운 종이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순간, 등 뒤에서 샤르가 다가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온갖 난관을 헤치고 한 달 전에 기적처럼 돌아온 샤르가 무리하지 않고 푹 쉬기를 바랐던 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샤르는 루이스턴에 약속이 있다며 어딘가 말을 얼버무렸고, 앤은 어른스럽게 행동하기 위해 더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샤르의 다정한 손길에 귓가까지 달아오른 앤은 풍향계정에 붙일 설탕과자 주문 벽보를 보여주었다. 샤르는 큰 규모의 파웰 할퍼드 공방을 두고 왜 이런 벽보가 필요한지 의아해했다. 앤은 공방의 작업 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깨달아 나만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설명하며, 이곳에 작은 설탕과자점을 열어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샤르는 둘 사이에 후손을 남길 수 없는 만큼 앤이 세상에 살아갔다는 거대한 증거를 역사에 남겨주고 싶었다며 거대 공방을 포기한 것에 아쉬움을 내비쳤으나, 앤은 자신다운 방식으로 살아간 증거를 남기겠다고 다짐했다. 샤르가 달콤하게 속삭이며 입을 맞추려던 찰나, 창틀 아래에서 이들을 훔쳐보던 미스릴을 발견하고 언짢은 얼굴로 빈 그릇을 던져 맞추었다. 미스릴이 마당으로 굴러떨어지자 사색이 된 앤이 뛰어나갔고, 샤르는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설탕 사과 숲 너머로 걸어갔다. 속절없이 멀어지는 샤르의 뒷모습을 보던 앤은 그가 사라졌던 지난 1년의 세월이 남긴 상처로 인해 가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강렬한 초조함과 슬픔에 휩싸였지만, 두 발에 힘을 주고 버티며 간신히 감정을 가라앉혔다.
앤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미스릴을 마차에 태워 함께 루이스턴으로 향했다. 단골 숙소인 풍향계정에 들러 오랜만에 만난 여주인의 환대를 받으며 벽보를 무사히 붙인 뒤, 앤과 미스릴은 활기찬 서쪽 시장 근처를 걸었다. 미스릴이 따뜻한 와인을 사러 간 사이 앤은 홀로 골목 어귀에 서서 오가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삶의 증거에 대해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때 인파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샤르의 늘씬한 뒷모습과 한쪽 날개를 발견하고 반갑게 부르려던 순간 앤의 목소리가 탁 막혀버렸다. 샤르가 곁에서 함께 걷던 금발에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비틀거리자 걱정스럽게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조심스레 끌어당기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군중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자 앤은 샤르가 볼일을 숨긴 이유를 깨달으며, 기억을 잃었던 지난 1년 동안 그에게 다른 연인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가슴속에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왔지만 제대로 된 어른 여자라면 샤르가 스스로 설명해 줄 때까지 믿고 기다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 미스릴이 일찍 잠들었으나 샤르는 한밤중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샤르가 돌아온 이후 앤이 긴장하는 바람에 거실 소파에서 따로 자던 밤들을 떠올리던 앤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아 밤이슬을 맞으며 그를 기다렸다. 다른 여자의 존재에 대한 외로움보다 그가 예전처럼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앤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달빛을 받으며 은빛 날개를 흔들고 걸어오는 샤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공포는 사르르 녹아내렸지만 외로움은 고스란히 남았다. 샤르가 앤의 앞에 무릎을 꿇고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을 때, 앤은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어른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샤르가 다정하게 입을 맞추려 다가왔지만 앤의 몸은 채 가시지 않은 불안과 의문 때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당황한 앤은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는 어설픈 핑계를 대며 샤르의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의연한 어른처럼 행동하지 못하고 연인의 입맞춤을 거부해 버렸다는 자괴감에 앤은 담요를 뒤집어쓴 채 한심한 제 모습을 책망하며 홀로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아침 앤은 평소 습관대로 동이 트기도 전에 눈을 떴다. 울다 지쳐 잠든 탓에 부은 눈을 비비며 나선 거실 겸 작업실은 아직 어둑했으나 창문 너머로 보랏빛 아침놀이 번지고 있었다. 긴 의자에서 잔뜩 옹송그리고 잠든 샤르의 모습을 보며 미안함을 느낀 앤이 살금살금 다가간 순간 샤르가 번쩍 눈을 떴다. 깜짝 놀라 비틀거리는 앤의 손을 샤르가 덥석 잡아끌었고 앤은 그대로 샤르의 품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앤은 코앞에 마주한 샤르의 깊고 아름다운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에게 어울리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어젯밤 일로 걱정하는 샤르에게 앤은 아무 일도 아니라며 얼버무렸고 샤르는 그런 앤의 눈꺼풀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뒤 오늘도 루이스턴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샤르에게 다른 연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그가 연기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앤은 문을 열고 나서는 샤르의 등에 와락 매달리며 가지 말라고 외쳤다. 자신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앤은 토끼 눈이 된 샤르를 뒤로한 채 설탕 사과 숲으로 도망쳤고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 뒤 밑동에 주저앉아 스스로의 바보 같은 모습에 괴로워했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정나미가 떨어졌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앤의 앞에 소년 요정 에릴이 갑자기 나타났다. 인간과 요정 세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떠났던 에릴과의 오랜만의 재회에 앤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에릴은 은설탕 요정 필두에게 부탁해 설탕 사과의 지맥을 타고 전송되어 온 것이라 말하며 한 달 전쯤 샤르가 필두의 거처로 직접 찾아왔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기억을 되찾은 샤르가 앤의 거처를 찾지 못해 쩔쩔매다가 결국 고개 숙이기 싫은 은설탕 요정 필두에게 찾아가 억지로 요구를 관철해 앤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우여곡절을 전해 들은 앤은 그제야 마침내 마음속을 짓누르던 불안감을 말끔히 씻어냈다. 한편 왕으로서 인간의 역사와 사상을 공부 중이던 에릴은 요정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가 될 수 있도록 소원을 담은 설탕과자를 만들어 달라고 정식으로 대가를 지불하며 의뢰를 해왔다. 앤은 자신의 첫 손님이 된 에릴의 의뢰를 기쁘게 수락했으나 에릴이 사흘 뒤에 찾으러 오겠다는 촉박한 기한을 남기고 사라지자 당황했다.
그때 숲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낸 샤르가 앤에게 다가왔다. 앤이 넘어졌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던 샤르는 앤의 뺨에 손을 얹으며 무리하는 이유를 물었고 앤은 마침내 샤르가 또 사라질까 봐 무서웠으며 멋진 어른처럼 굴고 싶었다는 진심을 고백했다. 샤르는 앤에게 무리하지 말고 그저 너다운 어른이 되라며 다정하게 입을 맞추어 앤의 고집과 슬픔을 녹여주었다. 이어 앤은 어제 루이스턴에서 샤르가 금발 머리 여성과 함께 있던 모습을 보았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샤르는 그녀가 브리짓이며 내년 봄 올란드와의 결혼을 앞두고 신부 예복을 보러 가는데 호위 삼아 동행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모든 오해와 불안이 풀린 앤은 설탕과자를 향한 뜨거운 의욕을 불태우며 샤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앤은 깨어난 미스릴에게 에릴의 의뢰 소식을 전하며 사흘 동안 작업에 몰두하겠다고 선언했고 미스릴은 밖에서 은설탕을 빻으며 도왔다. 샤르 역시 루이스턴 일정을 취소하고 첫날 온종일 곁에서 온화한 시선으로 앤을 지켜봐 주었다.
의욕이 충만해진 앤은 미스릴이 만든 유색 은설탕을 배합해 동틀 녘의 서광 같은 신비로운 색감을 자아내며 한시도 작업대 앞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쏟았다. 샤르는 둘째 날부터 다시 루이스턴으로 향했으나 불안감은 없었고 앤은 오직 손끝의 감각에 집중해 요정왕의 품격을 빚어냈다. 마침내 약속된 세 번째 날 아침이 밝아오고 햇살이 작업실로 쏟아져 들어올 때 앤은 설탕과자를 완성했다. 양팔로 안을 수 있는 크기의 작품은 겹겹이 층을 이룬 무지갯빛 고리 중심에 책, 지도, 검, 꽃, 나비 등 세상의 사물들을 휘감은 채 고요히 떠 있는 요정왕의 위엄 있고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고 있었다. 곁으로 다가온 샤르는 성스럽고 좋은 설탕과자라며 극찬했고 앤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 했으나 자다 깬 미스릴이 문을 벌컥 열고 나와 해가 뜨면 그 녀석이 온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거친 인사와 함께 은설탕사 캣과 그의 요정 벤자민이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캣은 앤의 설탕과자를 찬찬히 뜯어보며 너답고 좋은 작품이라 호평했고 앤은 큰 안도감과 기쁨을 느꼈다.
연이어 보랏빛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브리짓과 커다란 상자를 든 그녀의 약혼자 올란드가 문가에 나타났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브리짓은 앤의 손을 낚아채듯 이끌고 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갑다. 브리짓이 침대 위에 올려둔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실크 원단에 레이스와 비즈가 화려하게 수놓아진 순백의 신부 예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둔한 앤을 향해 브리짓은 주머니에서 오늘 날짜가 적힌 샤르와 앤의 결혼식 초대장을 꺼내 보였다. 샤르가 돌아온 이후 앤 몰래 이 거대한 이벤트를 계획했으며 브리짓에게 편지를 보내 드레스 선택과 당일 단장을 도와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던 것이었다. 샤르가 집을 비우고 루이스턴으로 향했던 진짜 이유가 오직 자신과의 결혼식을 완벽하게 준비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앤은 밀려오는 벅찬 감정과 행복을 주체하지 못했다. 시야가 뜨거운 눈물로 번져 발치로 툭툭 떨어지는 가운데 브리짓은 아이를 달래듯 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주겠다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단장을 마친 앤은 완벽하다는 브리짓의 찬사를 받으며 거울 속에 비친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쑥스럽게 바라보았다. 목과 어깨가 드러난 화려한 신부 예복과 비즈로 장식된 드레스, 촉감이 부드러운 베일을 갖추어 입은 앤은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당부를 받고 침실에 홀로 남겨졌다. 그러나 집 밖 설탕 사과 숲 쪽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북적이는 소리와 분주한 소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앤은 남들을 돕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슬그머니 침실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드레스 자락을 들고 출입구로 향하던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몰래 엿보는 것은 안 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앤이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자 방 한가운데에 에릴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에릴은 약속대로 설탕과자를 받기 위해 설탕 사과의 기맥을 타고 온 것이었으며, 앤은 갑작스러운 결혼식 소동에 잊고 있었지만 사흘 동안 필사적으로 반죽해 만든 요정왕 형상의 설탕과자를 에릴에게 보여주었다. 은빛 눈동자로 과자를 바라보던 에릴은 평온하고 멋진 요정왕의 모습이 진짜 자신이 될 수 있을지 불안해했으나, 앤은 미래는 알 수 없어도 에릴이 분명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거라며 행운을 기원하는 확신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과정에서 앤은 이름을 남기는 거창한 업적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만든 설탕과자로 인해 누군가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온 진정한 증거가 된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앤의 진심 어린 기원과 다짐을 들은 에릴은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앤의 마음과 행운이 담긴 설탕과자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설탕과자를 받아든 에릴은 그 대가로 이번 결혼식을 준비했음을 밝히며 문밖을 가리켰다. 일 년 동안 앤을 외롭게 만든 보답을 고민하던 샤르에게 필두 요정이 영원을 맹세하는 결혼식을 제안했고, 이를 들은 에릴이 식 준비를 돕는 대가로 앤에게 설탕과자를 주문했던 것이었다. 에릴은 앤의 친구들을 조사해 초대장을 보내고 브리짓에게 예복을, 벤자민에게 요리를 부탁하는 등 모든 과정을 남몰래 진행해 왔음을 털어놓았다. 이어 에릴은 주머니에서 하이랜드 왕국의 에드먼드 2세 국왕과 마르그리트 왕비가 보낸 축하 카드를 건넸다. 두 국왕 부부가 고치 탑에서 함께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며 두 사람의 혼인을 축복한다는 다정한 서신을 읽은 앤은 깊은 안도와 감동을 느꼈다. 바로 그때 설탕 사과 숲 쪽에서 미스릴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고, 에릴은 요정왕의 신분으로 인간과 요정들 앞에 함부로 나설 수 없다며 필두에게 돌아가 행복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에릴은 아쉬워하는 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축복을 내린 뒤, 작업대 위의 설탕과자와 함께 눈부신 빛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어서 문이 벌컥 열리며 뛰어 들어온 미스릴은 앤의 화려한 신부 모습에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작업대 위에 설탕과자가 사라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미스릴에게 앤은 에릴이 다녀갔음을 설명했고, 미스릴은 에릴을 기특하게 여기며 예식 준비가 완료되었으니 어서 가자고 앤을 재촉했다. 숲으로 향하는 길에 앤은 미스릴로부터 은설탕 자작인 휴의 부탁으로 캣이 직접 축하 설탕과자를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설탕 사과 숲에 가까워지자 하얀 식탁보를 씌운 탁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앤을 발견한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그 속에는 페이지 공방의 나디르, 발렌타인, 킹, 노아, 엘리엇, 다나, 하루가 있었고, 래드클리프 공방의 스텔라, 조나스, 캐시, 그리고 머큐리 공방의 존 킬레인과 멀리서 온 키스, 미리암, 홀리리프 성의 아렐 등 앤이 그리워하던 소중한 동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그 끝에는 무지갯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거대한 설탕 사과 나무 형상의 설탕과자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는 검은 의상을 입은 샤르가 휴와 캣과 함께 서 있었다. 샤르는 앤에게 다가와 오른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영원히 아끼고 지키겠다는 맹세와 함께 자신의 신부가 되어달라고 청혼했다. 입회인으로 나선 휴가 지켜보는 가운데, 샤르는 지난 일 년간 홀로 외로워했을 앤의 불안을 달래주며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겠다는 진심을 전했다.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영혼까지 늘 곁에 있겠다는 샤르의 깊은 다정함을 깨달은 앤은 신부가 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샤르가 앤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앤은 첫 만남의 기억을 떠올리며 벅찬 행복감에 샤르의 품에 안겼고, 두 사람은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서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휴가 두 사람의 혼인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하자 축복의 박수 소리가 온 숲을 가득 채웠다. 앤은 샤르에게 평생 함께하며 자신답게 설탕과자를 만들어 세상에 살아온 증거를 남기겠다고 나직하게 속삭였고, 샤르 역시 평생 곁에서 지켜봐 주겠다고 약속하며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했다. 따스한 가을 햇살과 달콤한 향기가 감도는 설탕 사과 숲에서 은설탕사 소녀와 요정은 서로를 품에 안으며 하나가 되었다.

[미스릴 리드 포드의 끝나지 않는 야망]
결혼식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미스릴 리드 포드는 식탁 위에 주저앉아 미간을 찌푸리며 커다란 걱정거리가 있다고 투덜거렸다. 화덕에서 푹 끓인 양파 수프 냄비를 식탁으로 옮기던 앤이 영문을 몰라 이유를 묻자, 미스릴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릅떴다. 그는 혼인한 지 일주일이나 지나도록 앤과 샤르 펜 샤르가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당황한 앤이 얼굴을 붉히며 굳이 그런 모습을 목격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미스릴은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히 결실을 보기 바란다는 핑계를 대며, 속으로는 편안한 보금자리를 지키고 평소 취미인 연애 소동극을 감상하기 위해 당장 제 앞에서 다정한 모습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했다.
앤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던 그때, 땔감을 들여놓고 방으로 들어온 샤르가 서늘한 목소리로 미스릴의 등 뒤에 나타났다. 미스릴은 기가 죽기는커녕 마침 잘 왔다며 샤르에게 저녁 식사로 나온 수프를 앤에게 서로 떠먹여 주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떼를 썼다. 샤르는 황당한 요구에 미스릴을 멍석에 말아 비둘기 등에 묶어 날려 버리겠다고 경고했지만, 미스릴은 걱정 때문에 밤에 잠도 안 와서 어지럼증이 생긴다며 수면 부족을 핑계로 식탁에 무릎을 꿇고 아픈 척 연기를 했다. 순진한 앤은 그 말을 곧이대로 믿고 안절부절못하며 수프를 떠먹여 주려고 숟가락을 움켜쥐었다.
샤르가 재빨리 앤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 들며 미스릴의 유치한 장난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앤의 허리를 한팔로 훅 끌어당겨 품에 안고서, 미스릴의 안색이 아주 반질반질하니 다 거짓말이라며 낮게 속삭였다. 그제야 속은 것을 깨달은 앤이 진정하자 미스릴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비록 원하던 연출된 장면은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샤르의 품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긴 앤과 그녀를 소중하게 감싸 안은 샤르의 밀착된 모습을 보게 된 미스릴은 남몰래 입을 가리고 흡족하게 웃었다.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한 미스릴은 색의 요정이 되겠다는 목표와 더불어, 두 사람의 달콤한 일상을 매일 만끽하며 앤의 첫사랑을 지켜주겠다는 자신만의 끝나지 않는 야망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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