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장]
하이랜드 왕국의 국왕이 인정하는 설탕과자 장인들의 정점인 은설탕 자작에게 주어지는 실버 웨스트르 성은 하얀 성벽과 첨탑이 호수와 숲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모든 장인의 성지처럼 군림했다. 이 성의 주인인 현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거리에서 도둑질을 일삼던 고아 출신이었으나, 설탕과자 장인 밑에서 견습 과정을 거쳐 머큐리 공방 창시자 일족의 양자가 되었고 끝내 자작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휴는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설탕과자 장인 세 파벌의 수장과 대리인들을 성의 천수각으로 불러모았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에 간소한 옷차림을 한 휴는 귀족적인 품위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야생적인 날카로움이 서린 눈빛만으로 좌중의 공기를 단숨에 제압했다.
그의 앞에는 머큐리 공방의 수석 대리인 존 킬레인과 페이지 공방의 대리인 엘리엇 코린즈, 그리고 래드클리프 공방의 수장 마커스 래드클리프가 앉아 있었다. 휴는 파벌의 체면을 고려해 상담하는 형식을 취했을 뿐 거절은 듣지 않겠다며 씩 미소 지었고, 그의 대리인인 존은 사전에 상의가 없었던 점에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찬성했다. 빨간 머리의 쾌활한 청년 엘리엇 역시 파벌의 이익을 위해 이의가 없음을 밝혔으나, 50대의 중후한 위엄을 가진 마커스는 이 막중한 일을 누가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마커스가 즉각 관리직을 자처하자 존은 은설탕 자작의 후광을 독점하려 한다며 반발했고, 엘리엇은 자신들의 규모가 작음을 인정하며 한발 물러나 두 사람의 다툼을 관망했다. 파벌 간의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지자 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공평하게 제비뽑기로 관리자를 정하자고 제안했다.
늦여름의 연분홍색 노을이 어둠에 잠긴 뒤 파벌의 수장들이 성을 떠나자, 휴는 자신의 방 발코니로 이어지는 긴 의자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 살림이 차를 들고 들어와 밤바람이 차다며 창문을 닫았다. 휴는 감정을 읽는 능력을 지닌 노동 요정 루시가 기분이 상해 대신 살림을 보냈음을 눈치챘다. 살림은 휴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제비뽑기 결과 래드클리프 공방이 관리 권한을 가져가게 되었기 때문인지를 물었다. 휴는 자신이 제안한 방식이니 어쩔 수 없다고 답했으나, 살림은 휴가 내심 앤을 위해 머큐리 공방이 일을 맡기를 바랐음을 지적했다. 래드클리프 공방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그들과 감정이 좋지 않은 앤이 정보에서 소외되고 고생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살림은 왜 샤르의 날개를 없애 앤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휴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렇게 하면 앤의 내면에 있는 소중한 무언가가 부서질 것 같아 무서웠다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휴의 입에서 무섭다는 말을 처음 들은 살림은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1장 설탕과자 흉작]
앤 할퍼드와 요정 샤르 펜 샤르, 미스릴 리드 포드를 실은 낡은 마차가 3개월 만에 왕도 루이스턴의 거리에 들어섰다. 마부석 중앙에 앉은 미스릴은 앤이 준 커다란 깃털 펜을 어깨에 짊어지고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글씨가 가득한 종이를 발치에 둔 채, 샤르를 향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여자가 머리를 묶는 것이 좋은지 푸는 것이 좋은지 묻는 시시콜콜한 질문에 샤르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미스릴은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대답을 요구했다. 결국 샤르가 시끄럽다며 통에 처넣겠다고 차갑게 응수하자 앤은 서둘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미스릴이 좋아하는 데운 와인을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다. 와인 향기에 마음이 풀린 미스릴이 질문을 멈추고 활기찬 시장 거리를 바라보는 동안, 앤은 1년 전 은설탕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올해 품평회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샤르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를 모델로 한 작품을 구상하던 앤은 방앗간 모퉁이를 돌다 마주 오던 마차와 아슬아슬하게 충돌할 뻔하며 급정거했다.
상대 마차의 마부가 앤에게 호통을 치려던 찰나,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두 사람은 동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부석에는 1년 전 루이스턴에서 인연을 맺었던 은설탕사 알프 힝글리, 일명 캣이 앉아 있었고 그의 어깨에는 노동요정 벤자민이 함께였다. 샤르는 캣을 고양이라 부르며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고, 이에 격분한 캣이 품위 없는 욕설을 내뱉으며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앤은 당황하며 상황을 수습하다가 캣으로부터 믿기 힘든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올해 하이랜드 왕국 전역에 설탕사과 흉작이 들어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의 명령으로 개인이 설탕사과를 수확하고 정제하는 것이 전면 금지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캣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설탕사과는 래드클리프 공방의 주도하에 수확 및 정제되며, 장인들은 공방의 작업에 참여하여 노동한 만큼만 은설탕을 배분받을 수 있었다.
앤은 그동안 왕국 남동부를 돌며 장사를 해왔음에도 이런 중요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샤르는 앤이 다른 장인들에게 질투를 사 일부러 정보 공유에서 소외된 것이라 짚어냈고, 앤은 자신을 향한 악의의 무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일행은 인근의 단골 술집인 풍향계정으로 자리를 옮겨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했다. 설탕과자 품평회에 참가하려는 장인은 반드시 래드클리프 본 공방에 기숙하며 공동 작업을 도와야 했고, 그 대가로 배분받은 소량의 설탕사과를 이용해 한밤중에만 개인 정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미 다른 참가자들은 보름 전부터 공방에 들어가 작업을 시작했기에 앤에게 남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과거 조나스에게 배신당했던 기억 때문에 래드클리프 공방에 가는 것이 꺼려졌지만, 앤은 은설탕사가 되기 위해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결심했다. 미스릴과 샤르 역시 앤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캣은 자신이 공방까지 안내해 주겠다며 앤에게 장인으로서 스스로 난관을 헤쳐나갈 것을 당부했다. 앤은 각오를 다지며 캣의 뒤를 따라 래드클리프 본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장 래드클리프 공방]
앤은 캣의 마차를 따라 왕성을 에둘러 가는 넓은 길을 지나 서쪽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일반적인 시장통보다 몇 배나 큰 건물들이 늘어선 거상들의 구역이었으며, 그 한구석에 갈색 벽돌담이 길게 이어진 래드클리프 본 공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앤은 캣과 함께 마차에서 내려 철책으로 된 여닫이문을 통해 공방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는 장인 세 명이 방문객의 이름을 확인하고 서명을 받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앤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아는 금발 청년 조나스가 있었다. 조나스는 앤을 보고 사색이 되어 멍하니 서 있었고, 뒤이어 나타난 접수 책임자 새미 존즈가 앤을 비웃으며 가로막았다. 새미는 앤이 여자라는 사실을 조롱하며 공방의 규칙상 노동요정이 아닌 애완요정 샤르를 데리고는 절대로 안으로 들일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앤 앞에 페이지 공방 출신의 장인 키스 파웰이 나타났다. 키스는 과거 풍향계정에서 앤을 도와주었던 일을 기억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샤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이 품평회 작품을 만드는 데 샤르를 모델로 삼겠다고 선언하면 샤르가 작업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 공방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앤은 샤르를 물건처럼 이용하는 것 같아 망설였으나, 샤르는 앤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모델이 되겠다고 자처하며 서류에 사인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앤은 키스의 도움으로 무사히 공방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앤은 래드클리프 공방의 기숙사 개인실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샤르는 창가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앤을 보며 다람쥐 같다며 무심하게 말을 걸었고, 앤은 샤르의 묘한 매력에 잠시 넋을 잃다가도 이내 마음을 다잡고 작업장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만난 키스는 자신이 전 은설탕 자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아버지의 후광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 래드클리프 공방에 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앤의 어머니 에마를 존경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앤에게 친밀감을 표했고, 올해가 앤에게는 은설탕사가 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격려를 남겼다.
앤은 곧바로 은설탕 정제 작업동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거대한 솥과 맷돌이 줄지어 늘어선 뜨거운 열기의 현장이었다. 공방의 수장 마커스 래드클리프는 앤에게 남자 장인들과 똑같이 일할 것을 냉정하게 요구했고, 조나스에게는 키스나 앤에게 밀린다면 차기 수장 후보에서 제외하겠다고 압박했다. 앤은 방으로 돌아가 조나스에게서 얻었던 낡은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본격적인 노동을 준비했다.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온 앤은 그곳에서 페이지 공방의 수장 대리인이자 자유분방한 성격의 엘리엇 코린즈와 그의 약혼녀 브리짓 페이지를 만났다. 브리짓은 장인복 차림의 앤을 보며 여자에게는 무리라며 차갑게 냉소했지만, 캣은 앤을 당당한 한 명의 장인이라 선언하며 일거리를 배정했다.
앤은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오는 발판 위로 올라가 빗자루만큼 커다랗고 묵직한 국자를 건네받았다. 펄펄 끓는 설탕사과 즙 위로 떠오르는 거품과 불순물을 걷어내는 작업은 상상 이상으로 고되었다. 앤은 팔 근육이 마비될 것 같은 통증과 온몸을 적시는 땀방울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국자를 움직였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설탕사과를 받을 자격도, 품평회에 나갈 기회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앤은 쏟아지는 장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오직 끓어오르는 솥 안에 집중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3장 만들어야 하는 것]
부뚜막의 불이 꺼지고 설탕사과 정제 작업이 마무리될 즈음 앤의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근육마다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고 나른해진 팔을 가누기조차 힘들었으나 작업동 밖으로 나오자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잠시나마 열기를 식혀주었다. 뒤뜰 큰 솥에서는 장인들에게 나눠줄 소 정강이 조림이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었고 배고픈 이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다. 앤은 현기증을 느끼며 줄 맨 뒷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솥 근처에서는 공방 수장 마커스의 가족들과 각 파벌에서 온 여인들이 배식을 돕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조나스의 요정 캐시와 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브리짓 페이지도 섞여 있었다. 마침내 앤의 차례가 되어 캐시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요정은 싸늘하게 고개를 돌리며 접시를 건네주지 않은 채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쏘아붙였다. 무례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지만 앤은 묵묵히 접시 세 개를 집어 들어 브리짓 앞으로 나아갔다. 브리짓은 땀에 젖어 엉망이 된 앤의 꼴을 비웃으며 한 사람당 한 접시라는 규칙을 내세워 음식을 담아주기를 거부했다. 일행의 몫까지 챙기려는 앤과 실랑이가 벌어지려던 찰나 옆에서 키스 파웰이 나타나 앤에게 요정 동행인이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곧이어 미스릴을 어깨에 얹은 샤르가 다가오자 브리짓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고 뺨을 붉히며 고분고분하게 접시를 채워주었다. 샤르는 앤의 접시를 대신 받아 들며 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했고 키스는 샤르에게 어떤 비밀을 간직하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주의를 주었다. 앤은 도움을 준 키스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무덤덤한 표정의 샤르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온 앤은 겨우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으나 정작 식탁 앞에서는 숟가락을 들 힘조차 없었다. 미스릴은 순식간에 식사를 마치고 잠이 들었지만 앤은 떨리는 팔 때문에 포크를 내려놓고 말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조나스가 나타나 차가운 소식을 전했다. 삼촌인 마커스의 지시라며 내일부터 시작될 은설탕 정제를 위해 오늘 밤 안에 필요한 설탕사과를 직접 물에 담가두라는 명령이었다. 피곤에 지친 앤의 안색을 살피던 조나스는 할 수 있겠느냐고 비아냥거렸으나 앤은 오기로라도 할 수 있다고 답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앤은 어두운 밤거리를 지나 창고로 향했고 무거운 설탕사과 상자들을 손수레에 실어 작업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보통 크기의 통으로 열 개가 넘는 분량을 채우기 위해 앤은 공방의 통을 빌려와 가며 밤샘 작업을 이어갔다. 한밤중 텅 빈 작업장에서 홀로 램프 불빛에 의지해 설탕사과를 물에 담그던 앤은 비로소 자신의 은설탕을 만들 수 있다는 안도감에 벽을 등지고 주저앉았다. 차가운 돌바닥 위로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가던 순간 누군가 앤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눈을 뜨자 그곳에는 샤르가 있었고 그는 무겁지 않느냐고 묻는 앤을 조용히 다독이며 침대까지 안아 옮겨주었다. 앤이 깊은 잠에 빠져든 사이 샤르는 그녀의 눈꺼풀에 조용히 입을 맞추며 앤이 마주한 가혹한 현실을 떠올렸다. 낮에 키스가 경고했듯 앤은 이미 다른 장인들의 질투와 방해의 표적이 되어 있었고 올해 은설탕사가 되지 못하면 장인으로서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샤르는 그녀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이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 앤의 팔 통증을 걱정한 샤르는 밤중에 몰래 우물가로 나가 물을 길어 올렸다. 젖은 천으로 통증을 식혀주기 위해서였다. 그때 낮에 마주쳤던 브리짓이 다가와 샤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요정인 샤르가 앤에게 혹사당하고 있다고 오해하며 자신이 샤르를 사서 편안한 생활을 보장해주겠노라 제안했다. 인간의 오만함이 섞인 동정에 분노한 샤르는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몰아세웠다. 자신을 키울 생각이냐는 샤르의 서늘한 물음에 브리짓은 겁에 질려 물러났고 샤르는 그런 인간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며 서둘러 앤의 곁으로 돌아갔다. 어느덧 설탕사과 공동 정제 작업이 6일째에 접어들었을 때 앤은 매일 팔이 올라가지 않을 정도의 중노동을 견디며 솥 안의 불순물을 걷어내고 있었다. 그때 새미 존즈가 나타나 작업 속도가 느리다며 앤을 발판 밑으로 밀쳐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앤에게 새미는 대량 생산되는 은설탕의 품질에 집착하지 말라며 비웃었으나 앤은 소중한 날을 위해 설탕과자를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결코 대충 만들 수 없다며 맞섰다. 조나스 역시 곁에서 앤의 고집을 비난했지만 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소란이 커지기 전 키스가 나타나 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키스는 공방의 감독관들이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 너무 애쓰지 말라며 앤을 다독였다. 앤은 키스의 배려에 마음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고 두 사람은 함께 키스의 방으로 향해 그가 제작 중인 작품을 감상했다.
키스의 작품은 샤르를 모델로 한 대규모 설탕과자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풀밭 위에 몸을 낮춘 강인하고 우아한 요정의 형상은 아직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키스의 뛰어난 실력을 확인한 앤은 같은 모티브로 승부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설탕사가 되기 위해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초조해하던 중 앤은 창밖으로 기숙사 뒷문에 서 있는 샤르와 브리짓을 발견했다. 브리짓이 갑자기 샤르를 껴안는 모습을 목격한 앤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샤르가 과거에 사랑했던 요정 리즈처럼 브리짓 역시 아름다운 금발을 가졌다는 사실이 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 앤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키스에게 이끌려 다시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한편 뒷문에서 브리짓의 고백을 듣고 있던 샤르는 그녀의 애정이 애완동물을 대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일갈한 뒤 그녀를 밀쳐냈다. 기숙사를 돌아 나오던 샤르는 멀리서 키스와 함께 웃으며 달리고 있는 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인간들 틈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앤의 환한 미소를 보며 샤르는 묘한 소외감과 함께 타오르는 질투를 느꼈다. 과거 리즈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인간에게 맡기려 했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욕망이었다. 앤을 누구에게도 내어주고 싶지 않다는, 요정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이 샤르의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4장 시조왕과 요정왕의 전설]
일주일 중 단 하루뿐인 휴일을 앞둔 저녁, 앤은 드디어 쉴 수 있다는 기쁨을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샤르는 식사를 마치고 키스의 부름을 받아 자리를 비운 뒤였고, 앤은 홀로 미스릴과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방 안에는 직접 정제한 네 통의 은설탕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앤은 좀처럼 그것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는 조바심과 낮에 보았던 샤르와 브리짓의 모습이 머릿속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앤은 미스릴을 데리고 찬 바람이 부는 뒤뜰로 산책을 나갔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미스릴은 샤르와 무슨 진전이 없느냐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고, 급기야 자신이 자리를 비워줄 테니 샤르에게 기습적으로 입을 맞춰 사랑을 쟁취하라는 황당한 조언을 늘어놓았다.
미스릴의 실없는 소리를 들으며 걷던 중, 두 사람은 설탕과자 제작동으로 향하던 조나스와 마주쳤다. 개인실을 배정받지 못한 조나스는 공용 작업실에서 밤샘 작업을 하려는 모양이었는데, 평소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비굴하고 나약한 말투로 앤에게 독설을 내뱉었다. 래드클리프 공방 수장의 조카라는 중압감과 차기 수장 자리를 위협하는 키스에 대한 불안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앤은 조나스의 뒷모습을 보며 그 또한 자신처럼 실력에 대한 조바심과 불안을 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앤은 왕실이 왜 유독 요정 형태의 설탕과자를 선호하는지 그 근원적인 이유를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방에는 이미 샤르가 돌아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앤은 내일 성 루이스턴 벨 교회에 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미스릴은 휴일에 쉬지 못한다며 투덜거렸으나, 앤과 샤르를 단둘이 있게 해주려는 속셈으로 자신은 캣의 방에서 벤자민과 놀겠다며 빠졌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앤은 용기를 내어 샤르에게 브리짓과의 일을 물었고, 샤르는 그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채 단지 자신을 사겠다는 무례한 요구에 날개를 꺾어보라 응수했을 뿐이라고 무덤덤하게 답했다. 오해가 풀린 앤은 안도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앤과 샤르는 루이스턴 남쪽에 우뚝 솟은 성 루이스턴 벨 교회에 도착했다. 거대한 석조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 앤은 천장에 그려진 세드릭 시조왕과 요정왕의 전설적인 전투 장면에 압도되었다. 검을 맞대고 싸우면서도 어딘지 슬퍼 보이는 두 존재의 표정을 보며 앤이 요정왕의 이름을 궁금해하자, 샤르는 국교회에서 봉인한 이름인 '리제르바 시릴 새슈'를 조용히 읊조렸다. 그때 다가온 노교부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이름을 알고 있는 샤르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왕실이 요정 과자를 아끼는 유래가 천장 벽화 주위에 새겨진 고대 문자에 적혀 있다고 알려주었다.
일반인은 읽을 수 없는 고대 하이란디아 문자를 샤르는 막힘없이 읽어 내려갔다. 샤르는 앤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전설의 진실을 속삭였다. 시조왕 세드릭은 본래 요정왕의 노예였으나 두 사람은 종족을 초월한 친구가 되었고, 인간과 요정의 공존을 꿈꿨으나 시대의 흐름에 밀려 결국 비극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승리한 세드릭은 죽은 친구를 추모하며 요정을 본뜬 설탕과자를 만들어 기도를 올렸고, 그것이 왕실의 전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앤은 깊은 감동과 함께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샤르의 아름다운 날개를 바라보며 앤은 자신이 느낀 이 사랑스러운 감정과 공존의 염원을 작품에 담기로 맹세했다.
공방으로 돌아온 앤은 곧장 도구들을 펼쳐 놓았다. 캣의 방에서 카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미스릴을 데려온 앤은 샤르에게도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앤은 요정의 생명과 감정이 깃든 날개의 색채를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은설탕을 정성껏 반죽하기 시작했다. 백여 가지의 색가루를 다섯 단계의 농담으로 나누어 무려 오백 가지가 넘는 섬세한 색조를 만들어내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앤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시조왕 세드릭이 바랐던 세상과 자신이 샤르를 향해 품은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앤은 오직 요정의 날개만이 가질 수 있는 신비로운 광택과 빛깔을 설탕과자로 형상화하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5장 모든 것을 공평하게]
앤은 마치 샤르의 날개를 직접 만지는 듯한 촉감과 색을 재현하기 위해 은설탕 반죽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은설탕의 감촉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관능적이었으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충동은 요정과 인간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앤의 간절한 마음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흰색을 포함해 무려 501개의 색으로 반죽된 은설탕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세심하게 그라데이션을 맞추어 나갔다. 낮에는 공방의 정제 작업을 하고 밤에는 개인 작업을 이어가는 강행군 속에서 앤은 매일 세 시간만 잠들며 기절하듯 휴식을 취했다. 광택과 색조를 잃지 않도록 얇게 늘린 은설탕 조각들을 요정의 날개 모양으로 자르고 비틀어 붙이는 작업은 이성이 아닌 오로지 만들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계속되었다.
그 무렵 키스의 작업을 돕던 샤르도 일손을 놓게 되었다. 키스가 작품을 완성하면서 더는 도움이 필요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샤르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앤의 모습에 감탄하며 키스의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온 샤르는 엘리엇의 방에서 들려오는 브리짓의 격양된 목소리를 들었다. 브리짓은 여자는 설탕과자 장인이 될 수 없다는 편견에 갇혀 지내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어엿한 장인으로 인정받는 앤의 존재에 질투와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캣은 샤르에게 브리짓이 그에게 집착하고 있으니 날개를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샤르는 농담 섞인 대답으로 응수하며 앤이 작업 중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품평회를 사흘 앞둔 날, 앤은 마침내 모든 작업을 마쳤다. 더 이상 그 손맛을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과 묘한 허무함이 그녀를 찾아왔다. 뒤뜰 나무 밑동에 앉아 쉬고 있던 앤에게 키스가 다가와 차가운 물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앤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소식에 키스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이제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미소 지었다. 그때 나타난 마커스 래드클리프는 두 사람의 작품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나섰고, 키스를 시기하며 뒤쫓던 새미도 내년을 기약한다는 핑계를 대며 슬쩍 합류했다.
먼저 공개된 키스의 작품은 초원에 무릎을 꿇고 먼 곳을 응시하는 샤르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었다. 날카로운 칼날 같은 나뭇잎과 은빛 날개, 강한 의지를 담은 눈동자는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어 앤의 방으로 향한 일행은 그녀가 덮어둔 천을 걷어내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곳에는 요정의 날개로 만들어진 수많은 덩굴장미가 서로 얽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꽃잎과 잎사귀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그라데이션을 띠며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마치 만질 수 없는 환상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마커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작품을 칭찬했고,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강했던 키스조차 앤의 작품이 뿜어내는 기세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새미는 그런 키스의 모습을 보며 어두운 분노를 삼켰다.
그날 저녁, 앤은 키스의 칭찬에 고무되어 샤르, 미스릴과 함께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행복한 기분도 잠시, 조나스가 나타나 마커스가 급하게 부른다는 소식을 전하며 앤을 작업동으로 데려갔다. 인적이 끊긴 어두운 작업동 안쪽에는 마커스 대신 새미와 일행들이 부뚜막에 불을 피워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새미는 앤이 은설탕 자작을 유혹해 공정한 심사를 방해하려 한다고 억지 주장을 펼치며, 래드클리프 공방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손을 망가뜨려야 한다고 조나스를 압박했다. 겁에 질린 조나스는 끝내 거부하며 도망쳤지만, 새미는 직접 앤의 두 팔을 붙잡았다. 붉게 타오르는 숯불의 열기가 앤의 얼굴에 닿았고, 새미는 비정상적인 집착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부뚜막 앞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6장 어떤 의혹]
창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샤르에게 미스릴이 다가와 여자가 키스를 요청하면 기꺼이 응하는 타입이냐는 엉뚱하고도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샤르는 황당함에 미스릴을 붙잡아 침대 위로 던져버리며 다시는 그의 진지한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순간 기숙사 계단을 다급하게 뛰어 올라온 조나스가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뺨에 눈물을 흘리며 작업동에서 앤의 손이 타버릴 위기에 처했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샤르는 조나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고, 조나스의 곁에는 요정 캐시가 다가와 그를 부드럽게 위로했다.
어둠을 가르며 달리는 샤르의 손바닥 위로 빛의 알갱이들이 모여 검의 형상을 갖추었다. 작업동으로 뛰어 들어간 샤르는 부뚜막의 불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앤과 그녀를 둘러싼 인영들을 발견했다. 분노에 휩싸인 샤르가 은빛 칼날을 휘두르며 돌진하자 겁에 질린 새미 일행이 흩어졌다. 앤은 힘없이 주저앉은 와중에도 샤르가 살인을 저질러 붙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이면 안 된다고 간절히 소리쳤고, 그 목소리에 샤르의 칼날은 간발의 차로 새미의 가슴 대신 셔츠만을 찢었다. 샤르는 반드시 너희를 죽이겠다고 차갑게 경고하며 그들을 쫓아낸 뒤, 떨고 있는 앤의 양손을 쥐고 무사함을 확인하며 안도의 입맞춤을 건넸다.
잠시 후 미스릴과 키스가 작업동으로 달려왔고, 앤은 조나스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샤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키스는 새미 일행의 만행을 마커스에게 보고해 그들을 파벌에서 쫓아내겠다고 다짐했지만, 현장에 나타난 마커스 래드클리프는 오히려 조나스가 범인이라며 그를 파벌에서 내쫓겠다고 선언했다. 새미가 먼저 마커스를 찾아가 조나스가 앤을 해치려 한다고 거짓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앤과 키스는 조나스가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라며 필사적으로 항변했으나, 마커스는 조나스가 삼촌인 자신을 제쳐두고 요정에게 도움을 청했을 리 없다며 앤의 증언을 묵살했다. 결국 마커스는 앤에게까지 자작극의 의혹을 제기하며 공방에서 떠나라고 명령했고, 앤은 억울함 속에서도 조나스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하며 그곳을 나왔다.
다음 날 앤은 자신이 직접 정제한 은설탕 세 통과 설탕과자 작품을 마차에 싣고 공방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문 앞에서 배웅을 나온 키스와 캣은 새미의 죄를 밝혀내겠다는 약속을 건넸고, 앤은 그들을 뒤로한 채 길을 나서다 가방을 메고 방황하던 조나스를 발견했다. 앤은 마차를 멈추고 조나스에게 달려가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조나스는 널 위해 한 일이 아니라며 끝까지 독설을 내뱉고는 등을 돌려 떠나갔으나, 앤은 그의 뒷모습에 대고 다시 한번 고맙다고 외쳤다.
숙소인 풍향계정에 도착한 앤이 피로에 지쳐 잠든 사이, 미스릴은 마차에 실린 은설탕을 몰래 맛보려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통 안에 든 것은 앤이 정성껏 정제한 은설탕이 아니라 맛과 색이 현저히 떨어지는 대량 생산된 설탕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샤르는 앤이 실망하여 품평회를 포기할 것을 염려해 미스릴에게 비밀로 하라고 당부한 뒤, 직접 은설탕을 되찾기 위해 다시 래드클리프 공방으로 향했다. 샤르는 캣, 키스, 엘리엇의 협조를 얻어 조사에 착수했고, 엘리엇의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브리짓으로부터 결정적인 증언을 들었다. 브리짓은 오늘 아침 누군가 은설탕 통을 바꿔치기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하면서도, 샤르에 대한 애증과 앤에 대한 질투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설탕과자 품평회 당일, 앤은 샤르가 딸 딸꾹질을 멈출 약초를 구하러 갔다는 미스릴의 말을 믿지 못한 채 불안한 마음으로 행사장에 도착했다. 광장에는 이미 많은 관객과 장인들이 모여 있었고, 앤은 지시받은 자리에 자신의 설탕과자를 진열했다. 국왕의 참석을 기다리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가 한 통의 편지를 들고 장인들 앞에 섰다. 휴는 앤 할퍼드가 은설탕을 정제할 기술이 없는 사기꾼이며 그녀가 가져온 설탕이 대량 생산품이라는 익명의 고발이 접수되었다고 발표했다. 관중들의 술렁임 속에서 휴는 사실 확인을 위해 앤의 은설탕을 조사하겠다고 선언했고, 자신의 설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앤은 당당하게 그 조사를 받아들였다.
[7장 부족한 설탕과자에]
키스와 캣이 설탕과자 품평회 장소로 먼저 떠난 뒤, 엘리엇 역시 약혼녀 브리짓의 요정에 대한 집착을 방관하며 방을 나갔다. 날이 밝아 품평회 시간이 임박했지만 앤이 정제한 은설탕은 공방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절망한 키스와 캣은 먼저 광장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샤르는 브리짓을 내려다보며 앤의 은설탕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며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브리짓은 자신이 죽으면 샤르도 처형당해 앤에게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며 비웃었다. 협박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샤르는 앤의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 오랫동안 망설였던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소유욕을 억누르며 브리짓에게 자신의 날개를 대가로 은설탕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제안했다. 브리짓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고, 샤르에게 입맞춤을 요구한 뒤 그를 은설탕이 숨겨진 곳으로 안내했다.
그 시각 품평회 광장에서는 휴와 마커스의 주도하에 장인들의 은설탕 검사가 시작되었다. 앤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통의 뚜껑을 열었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조잡한 대량 생산용 은설탕이 들어 있었다. 관중들은 앤을 향해 실격이라며 야유를 보냈고 앤은 큰 충격에 빠졌으나, 과거 자신을 최고라 치켜세워주었던 공작의 말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앤은 품평회 참가를 포기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은설탕을 정제했다는 사실만은 증명하겠다며 국왕에게 간청했다.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앤은 자신의 작품인 덩굴장미의 꽃 한 송이를 꺾어 왕실 요정 클리포드에게 맛을 보게 했다. 클리포드는 그 맛이 대량 생산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며 앤의 실력을 증명해주었다.
이때 광장 가장자리에서 브리짓이 샤르와 함께 나타나 앤의 은설탕이 새미 존즈의 통에 들어있다고 폭로했다. 휴가 확인한 결과 새미의 통에는 앤의 은설탕이 들어있었고, 욕심에 눈이 멀어 설탕을 훔쳤던 새미는 현장에서 실격당해 끌려 나갔다. 앤은 다시 참가 자격을 얻었으나 이미 작품의 일부가 부서진 상태였다. 본격적인 심사가 시작되자 국왕은 샤르를 완벽하게 재현한 키스의 작품에 감탄하면서도, 부서진 앤의 작품이 가진 묘한 매력 사이에서 고민했다. 왕비는 살아있는 샤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실물을 완벽히 재현한 키스의 작품보다,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형상화한 앤의 작품이 더 매력적이라며 앤의 편을 들었다. 결국 국왕은 앤의 손을 들어주며 그녀를 올해의 은설탕사로 선언하고 왕가훈장을 수여했다.
앤은 어머니 에마가 소중히 간직했던 것과 같은 하얀 훈장을 손에 쥐고 평생 성스러운 것을 만드는 장인으로 살겠다고 맹세했다. 키스는 자신의 패배를 겸허히 인정하며 내년의 재회를 약속했다. 앤은 훈장을 가장 먼저 보여주기 위해 샤르에게 달려갔지만, 샤르는 이제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차가운 말을 남겼다. 당황한 앤을 껴안으며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고 속삭인 샤르는 앤의 눈가에 입을 맞춘 뒤 브리짓을 따라 떠나버렸다.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앤 앞에 엘리엇이 나타나 샤르가 앤의 은설탕을 되찾기 위해 브리짓에게 자신의 날개를 팔아 자유를 버렸다는 잔인한 진실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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