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그들을 부르는 자]
눈부신 햇살이 아직 녹지 않은 홀리리프 성의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앤은 현관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뜬 채 멀리 언덕 아래 길을 살폈으나, 기다리는 마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신성제가 끝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고 절정이었던 추위도 한풀 꺾여 지붕과 숲에 남은 눈들이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앤의 어깨에 앉은 물방울 요정 미스릴 리드 포드가 마차 소리를 들은 것 같다며 소란을 피우자, 뒤에 서 있던 흑요석 요정 샤르 펜 샤르는 독설을 내뱉으며 그를 놀렸다. 앤은 투덜거리는 미스릴을 달래다 무심코 햇살 아래 서 있는 샤르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을 내뱉었고, 샤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앤의 귓가에 속삭여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 페이지 공방의 대리인 엘리엇 코린즈가 현관으로 나오며 내일 밀스필드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앤은 각오했던 이별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쓸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캣과 조나스는 이미 떠났고, 주인을 기다리며 성을 지키던 요정 노아는 설탕과자에 매료되어 페이지 공방의 수습으로 함께 가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도 들려왔다. 엘리엇은 앤에게 키스와 함께 새 공방을 세우기로 한 결심을 물었고, 앤은 자신의 이상을 찾기 위해 성실한 파트너인 키스와 함께하는 길이 최선이라고 답했다. 샤르는 앤의 선택이 지금으로선 최선이라며 조용히 긍정했다.
이때 언덕 아래에서 묵직한 마차 소리가 들려오더니, 은설탕 자작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한 마차가 현관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는 평소와 달리 예복을 갖춰 입은 엄숙한 모습이었다. 그는 엘리엇과 앤에게 사흘 뒤 정오까지 설탕과자 도구를 지참하여 왕성으로 출두하라는 갑작스러운 명령을 전했다. 앤은 이름 없는 장인인 자신이 왜 불려 가는지 당황했지만, 휴는 이유를 함구한 채 특히 샤르를 반드시 동행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휴는 억울해하는 미스릴을 뒤로하고 돌아서다 뒤늦게 도착한 키스 파웰과 마주쳤다. 키스는 자신에게는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움쥐었다.
일행은 성 안으로 자리를 옮겨 키스로부터 다른 공방의 장인들에게도 소집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머큐리 공방의 존 킬레인과 래드클리프 공방의 실력자 스텔라 녹스가 그 대상이었다. 각 파벌에서 실력자가 한 명씩 뽑힌 상황에서 앤이 포함된 이유를 두고 추측이 오갔지만, 키스는 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한 채 서둘러 성을 떠났다. 앤은 언제나 다정했던 키스가 자신을 피하는 듯한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고, 샤르는 자신이 왕궁에 지명된 이유가 과거 귀족들과 마주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지 생각하며 찻잔을 감싸 쥐었다.
성을 떠난 키스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초조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루이스턴 시내를 헤맸다. 그는 앤을 대등한 경쟁자로 여겨왔으나, 그녀만 선택받고 자신은 제외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불안을 느꼈다. 결국 키스는 자존심을 굽히고 휴 머큐리의 별저를 찾아가 자신을 뽑지 않은 이유를 따져 물었다. 휴는 앤보다 뛰어난 점을 증명해 보라며 그를 압박했고, 키스는 앤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녀와 동등한 자리에 서고 싶다는 진심을 쏟아냈다. 휴는 파웰의 아들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욕심을 드러낸 키스의 모습에 만족하며, 사실 앤을 부르라는 지시가 따로 있었음을 밝히고 키스에게도 왕성 입궐을 허락하는 추가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홀리리프 성의 앤의 방에서 샤르는 잠든 앤과 미스릴을 지켜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페이지 공방 사람들은 모두 떠나 성안은 고요해졌고, 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변화를 택하며 한 발짝 나아가고 있었다. 샤르는 앤이 행복을 찾아 안정을 얻게 되면 더는 자신이 그녀 곁에 머물 이유가 사라질까 봐 내심 두려워하면서도, 그녀가 키스와 공방을 차리는 일이 미뤄진 것에 안도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느꼈다. 그는 창밖의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며, 자신까지 왕성으로 불러들인 정체 모를 운명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의문을 품은 채 밤을 지새웠다.
[2장 은설탕 요정]
앤은 마차를 타고 왕도 루이스턴의 중심에 우뚝 선 거대한 왕성으로 향하며 홀리리프 성에 홀로 남겨진 미스릴 리드 포드를 떠올렸다. 마차의 고삐를 잡은 엘리엇과 그 옆의 샤르는 미스릴이 너무 순순히 집을 보겠다고 한 점을 의심하며 대화를 나누었으나, 앤은 그저 그가 지루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샤르는 미스릴이 분명 무언가 꾸미고 있을 것이라며 미간을 좁혔고 엘리엇은 성에서 여자들과 파티를 여는 남자의 로망을 실현할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과정에서 샤르가 앤을 빈약한 어린애라고 지칭하자 앤은 마음이 조금 상하기도 했지만, 눈앞에 나타난 왕성의 압도적인 위용을 마주하자 서민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경외심과 불안에 휩싸였다.
위병의 안내를 받아 세 겹의 복잡한 성벽을 지나 도착한 곳은 성의 가장 오래된 구역에 자리한 고치의 탑이었다. 덩굴이 원뿔형 탑을 빽빽하게 뒤덮어 마치 거대한 고치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은설탕 자작 예복을 갖춰 입은 휴가 일행을 맞이했다. 탑 내부에는 이미 머큐리 공방파의 수장 대리 존 킬레인과 래드클리프 공방의 까칠한 천재 장인 스텔라 녹스가 도착해 있었고, 뒤이어 키스 파웰까지 합류하며 다섯 명의 장인이 모두 모였다. 휴는 이들이 젊고 재능 있는 인재들이라 선언하며 예우를 갖추게 했고, 곧이어 우아한 기품을 풍기는 왕비 마르그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비는 이들이 차기 은설탕 자작의 후보로 선택되었음을 알리며, 여기서 배우게 될 모든 기술과 비밀을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엄중한 맹세를 요구했다.
그때 탑의 나선형 계단 위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금발의 요정 루루 리프 린이 내려왔다. 그녀는 날개가 한 장뿐이었으나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자신이 이들의 스승이 될 것임을 오만하면서도 당당하게 선포했다. 특히 루루는 샤르를 보자마자 그가 마지막 요정왕 리제르바의 검에 박혀 있던 흑요석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며 위층으로 불러들였다. 앤은 샤르가 홀로 올라가는 모습에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서글픔을 느꼈지만, 곧이어 시작된 휴의 설명에 집중하며 장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최상층으로 올라간 루루는 샤르에게 자신이 육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마지막 은설탕 요정임을 고백했다. 과거 요정왕을 섬기며 설탕과자를 빚던 요정들이 시조왕 세드릭에 의해 이곳 루이스턴 성에 갇히게 된 비극적인 역사와, 동료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아 왕가의 기술을 보존해 왔던 세월을 덤덤히 털어놓았다. 루루는 리제르바가 요정의 미래를 맡겼던 세 개의 돌 중 하나인 샤르를 대면하며 그리움을 내비쳤고, 샤르는 그녀를 통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과 요정왕의 의지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 애썼다.
동시에 아래층에서는 휴가 장인들에게 은설탕 자작이라는 직위 뒤에 숨겨진 진실을 폭로했다. 왕가는 요정들만이 가진 독보적인 설탕과자 정제 비술을 독점하여 그 행운을 누리기 위해 은설탕 요정들을 보호라는 이름 아래 구금해 왔으며, 은설탕 자작은 그 비술을 전수받아 왕가에 바치는 충직한 관리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었다. 앤은 루루의 훼손된 날개를 떠올리며 왕가의 잔혹함을 직감했으나, 요정의 비술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장인으로서의 뜨거운 갈망을 억누르지 못했다. 휴는 루루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왕가가 다급하게 계승자를 늘리려 한다는 상황을 전달하며, 다섯 명의 장인에게 요정의 제자가 되어 그 위대한 비술을 이어받으라는 거부할 수 없는 임무를 내렸다.
[3장 다섯 명의 계승자와 마지막 침입자]
스텔라 녹스는 팔걸이의자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백한 안색으로 연신 기침을 토해냈고, 두꺼운 외투와 담요로 몸을 감싸고서도 가시지 않는 한기에 양팔을 문질렀다. 벽난로 앞 양탄자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엘리엇은 그런 스텔라를 아가씨라 부르며 장난스럽게 유혹하듯 곁으로 불렀으나, 스텔라는 화를 내려다 다시 격렬한 기침을 터뜨렸다. 급히 달려온 키스가 스텔라의 등을 쓸어주며 진정시켰고, 엘리엇은 스텔라라는 이름이 여자아이 같아 귀여워서 그랬다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키스는 스텔라의 집안이 질투와 저주를 피하고자 일부러 여성형 이름을 지어준 사연을 설명하며 중재하려 했으나, 기침을 가라앉힌 스텔라는 엘리엇을 지지리 궁상이라 맞받아치며 날 선 신경전을 벌였다.
장인들이 머물게 된 제1 천수각의 숙소는 고치의 탑을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으며, 급하게 꾸며진 흔적이 역력한 싸늘한 돌벽 사이로 새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장인들은 거실 난로 앞에 모여들었지만, 앤의 마음은 루루와 함께 탑으로 사라진 샤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텔라는 요정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불만을 터뜨리며 앤에게 부리는 요정에게 고개를 숙이느냐고 물었으나, 앤은 샤르가 부리는 존재가 아닌 대등한 친구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킬레인은 자작의 지시에 의문을 품지 말라며 단호하게 대꾸했고, 스텔라는 자작의 강압적인 방식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이들 사이에서도 묘한 긴장감은 계속되었다. 키스는 스텔라의 무례함을 지적하면서도 은설탕 자작의 방식이 더 배려 깊었어야 했다고 덧붙였으나, 엘리엇은 그런 키스를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라 비꼬며 권력자의 생리를 역설했다. 킬레인이 자작을 옹호하며 끼어들자 엘리엇은 킬레인이 과거 은설탕 자작의 설탕 과자에 반해 신학교까지 중퇴했던 과거를 폭로하며 그를 자극했다. 당황한 킬레인이 화를 내며 자리를 뜨자 엘리엇 역시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고, 거실에는 앤과 키스만이 남게 되었다. 키스는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앤을 방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나섰다.
복도를 걷던 중 창밖으로 환하게 빛나는 고치의 탑을 발견한 두 사람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앤이 은설탕 요정의 설탕 과자에 대해 순수한 열의를 보이자, 키스는 그런 앤의 진지한 태도에 경외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끼며 씁쓸하게 자신을 탓했다. 앤은 키스의 묘한 기류를 느꼈지만 돌아오지 않는 샤르가 걱정되어 다시 탑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키스를 먼저 보낸 앤이 차가운 공기를 뚫고 걸음을 떼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푸른 눈을 가진 단정한 사내와 마주쳤다. 자신을 왕비의 시종인 에디라고 소개한 그는 앤을 알아보고는 불편한 점이 있으면 왕비에게 전해달라는 친절을 베푼 뒤 유유히 사라졌다.
앤은 다시 탑 출입구를 살피다 마침내 밖으로 나오는 샤르를 발견하고 반가움에 달려가려 했으나, 그의 뒤를 따라온 루루의 모습에 그만 멈춰 서고 말았다. 달빛 아래 마주 선 두 요정의 모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특히 루루의 뺨을 어루만지는 샤르의 미소는 앤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편안한 종류의 것이었다. 요정끼리 나란히 서서 서로의 빛나는 날개를 마주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앤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상실감과 소외감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없는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어울리는 짝이라는 생각에 앤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방으로 돌아온 앤은 담요를 뒤집어쓴 채 숨을 죽이고 울었으며, 잠시 후 루루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샤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샤르는 오백 년 동안 날개를 빼앗긴 채 살아온 루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앤의 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방을 마다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침대 위에서 웅크린 덩어리를 발견한 샤르는 자는 척하는 앤의 옆에 누워 그녀를 자극했고, 당황해 벌떡 일어나려다 도롱이벌레처럼 굴러버린 앤의 젖은 눈가를 확인했다. 샤르는 앤의 손목을 잡고 울고 있는 이유를 집요하게 물으며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분위기가 절정에 달해 샤르의 몸이 움직이려던 순간, 열린 문틈으로 호수 물방울의 요정 미스릴 리드 포드가 나타나 야한 장면이냐고 외치며 두 사람의 긴박한 순간을 깨뜨렸다.

[4장 요정의 제자]
미스릴 리드 포드가 앤의 마차에 몰래 숨어 왕성까지 따라온 사실이 발각되었다. 샤르는 도망치려던 미스릴의 목덜미를 낚아채 앤의 앞으로 내던졌고, 당황한 미스릴은 샤르가 걱정되어 따라왔다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단 침입이 들통나면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샤르의 경고에 미스릴은 새파랗게 질려 앤의 무릎에 매달렸고, 앤은 어수선한 소동 덕분에 샤르에게 울고 있던 이유를 들키지 않고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앤은 루루 리프 린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설탕과자 세공 도구함을 챙겨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던 중 앤은 마르그리트 왕비와 휴가 나누는 은밀한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왕비는 루루가 자신을 피하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며 휴를 몰아세웠고, 왕가의 후계자 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며 왕가에 해가 된다면 처분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휴는 왕가를 배신하지 않으니 믿어달라며 왕비를 돌려보냈고,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앤은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고치의 탑으로 향했다.
탑 2층 작업장에 도착한 앤은 500년의 세월이 깃든 은설탕 향기에 압도되었다. 곧이어 나타난 요정 루루는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지 말고 편하게 이름을 부르라고 권하며 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앤은 루루에게 샤르를 부른 이유를 물었고, 루루는 단순히 아름다운 요정을 보고 싶었을 뿐이라며 샤르를 연인으로 삼아도 좋겠다고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 말에 앤은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통증을 느꼈지만 샤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곧이어 엘리엇, 킬레인, 키스, 스텔라가 작업장에 모였고 루루는 그들에게 각자 자신 있는 설탕과자를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장인들은 왕궁의 고운 은설탕 감촉에 감탄하며 각자의 기술을 발휘해 꽃, 인물, 왕관, 교회, 나비 등을 빚어냈다. 루루는 장인들의 작업을 살피던 중 앤의 도구함에서 갈고리 모양의 낡은 도구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앤이 어머니 에마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자 루루는 묘한 표정으로 한동안 도구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작업이 끝나자 루루는 휴를 시켜 베일에 싸여 있던 설탕과자를 공개했다. 그것은 빛이 투명하게 스며들어 무지개처럼 생생한 색채를 뿜어내는 깃발 모양의 설탕과자였다. 압도적인 기술력에 장인들이 넋을 잃자, 루루는 은설탕 그 자체가 선명한 색을 지니게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주겠다며 그들을 성 밖 설탕사과 숲으로 이끌었다.
일행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다우닝 백작과 마주치기도 했다. 백작은 샤르를 예리하게 경계하며 정체를 물었지만 샤르는 그저 앤의 호위일 뿐이라며 담담하게 응수했다. 이동 중인 마차 안에서 루루는 장인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인간은 본질을 보지 못해 500년 동안 이 기술을 깨닫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과거에 요정 장인을 육성하려 했으나 자질 있는 자를 찾지 못했던 왕가의 실패담을 들려주었다.
설탕사과 숲에 도착한 루루는 어느 벽돌 오두막으로 장인들을 데려갔다. 그곳에는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의 짙은 액체가 담긴 통들이 줄지어 있었다. 루루는 이것이 봄맞이꽃잎을 달인 물이며, 이를 사계절 내내 설탕사과나무 뿌리에 주어 수확하면 은설탕 자체가 천연의 색을 머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물질을 섞지 않고 은설탕의 배합만으로 선명한 색을 내는 요정의 기술에 장인들은 큰 충격과 전율을 느꼈다.
장인들이 새로운 지식에 도취해 있는 순간, 루루는 돌연 앤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의 품에 가두고는 그녀의 목에 예리한 칼날을 들이댔다. 500년이라는 기나긴 속박의 세월에 지친 루루는 앤을 인질로 삼아 자유를 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당황한 휴가 멈추라고 소리쳤지만, 루루는 날개가 찢겨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단 한 순간의 자유를 택하겠다며 샤르에게 자신을 도와 함께 달아나자고 제안했다. 샤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금 마지막이라고 했냐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5장 사라져 가는 힘, 이어 붙이는 힘]
샤르의 날카로운 질문에 루루는 마치 비밀을 들킨 듯 얼굴을 찌푸렸고, 그 순간 그녀를 지탱하던 희미한 기운이 모래알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앤을 위협하던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져 청량한 금속음을 냈고, 루루는 도망칠 힘조차 남지 않은 현실에 분해하며 앤의 품에 안기듯 주저앉아 의식을 잃었다. 휴는 서둘러 그녀를 마차에 태워 왕성으로 향했으며, 마차가 흔들리는 내내 앤은 루루의 가벼운 몸을 부축하며 과거 주인의 명령을 따르느라 먹는 것을 거부해 형체마저 희미해졌던 요정 노아를 떠올렸다. 고치의 탑에 도착해 샤르가 루루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휴는 지친 기색으로 장인들에게 오늘 수업은 무리이니 천수각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스텔라는 쓰러진 스승이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며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지만, 휴는 씁쓸한 표정을 감춘 채 그녀가 너희를 가르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단언하며 장인들을 돌려보냈다. 앤은 휴가 무언가 중대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직감을 떨칠 수 없었으나, 그때 가냘픈 목소리로 의식을 되찾은 루루가 사과하고 싶다며 앤을 불러 세웠다. 앤은 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아 창백한 루루의 얼굴을 보며 가슴 아파했고,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설탕과자를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루루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필요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어 루루는 휴를 올려다보며 도망치려 했던 자신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물었고, 휴는 다섯 명의 장인을 제대로 가르친다는 약속만 지킨다면 왕비에게 보고하지 않고 눈감아주겠다며 은설탕 자작다운 냉철한 조건을 내걸었다.
그때 나선 계단에서 나타난 마르그리트 왕비가 눈물을 흘리며 루루의 손을 꼭 잡았으나, 루루는 오히려 지긋지긋하다는 듯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모두를 방에서 내쫓았다. 아래층 작업장으로 내려온 휴는 왕비에게 루루의 상태가 단순한 기력 저하가 아니라 수명이 다한 것이라고 나직하게 고백했다. 거대한 나무에서 태어난 요정의 천 년에 가까운 삶도 이제 한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휴의 말에, 몰래 대화를 엿듣던 앤은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왕비는 이 사실을 숨긴 휴의 뺨을 때리며 분노했지만, 휴는 루루가 왕비의 눈물을 원치 않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며 스승의 마지막 소원을 존중하겠다고 맞섰다.
고치의 탑을 빠져나온 앤은 침통한 표정으로 걷다가 문득 샤르의 옷자락을 붙잡고 루루가 그를 연인으로 원한다는 소식을 대신 전했다. 샤르는 앤의 담담한 태도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정말 앤의 바람이라면 가서 확인해보겠다며 다시 루루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홀로 남겨진 앤은 루루의 남은 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괴로움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내 눈물을 터뜨렸고, 그때 나타난 키스가 그녀를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 키스는 자신의 품에 안긴 앤의 가녀린 체구와 달콤한 향기를 느끼며 그녀를 단순한 경쟁자가 아닌 지켜주고 싶은 여자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같은 장인으로서 곁에 서기 위해 더 강해지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한편 다시 루루를 찾아간 샤르는 연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 앤을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루루는 샤르의 화난 반응을 통해 그가 앤을 사랑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루루는 요정과 인간의 수명 차이를 두려워하는 샤르에게 생명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행복한 기억의 양이라며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고, 오백 년간 갇혀 지낸 자신의 삶보다 리제르바와 함께한 백 년이 더 다채로웠음을 회상했다. 평화로운 대화도 잠시, 몰래 따라온 미스릴이 나타나 샤르가 앤을 덮치고도 다른 미인과 밀회를 즐긴다며 엉뚱한 오해를 퍼부어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 시각 울음을 그친 앤은 키스에게 루루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털어놓으며 그녀를 위해 설탕과자를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어느새 나타난 휴가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앤의 팔을 낚아채 차가운 방으로 그녀를 거칠게 끌고 들어갔다.
[6장 플라이휠과 은빛 실]
휴는 앤이 자신과 왕비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고, 앤은 루루가 걱정되어 진실을 알고 싶었다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휴는 루루의 남은 수명에 대해서는 말해도 좋지만 왕비와의 관계 등 그 자리에서 본 다른 일들은 모두 잊으라고 경고하며, 과거 자신이 머큐리 공방의 장인으로서 왕비의 친가인 캐벗 가를 드나들던 친구 사이였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앤에게 루루가 내일부터 다시 지도를 시작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함과 동시에, 반죽한 은설탕을 새로운 방법으로 성형하는 법을 고민해 보라는 숙제와 함께 실을 잣는 도구인 플라이휠을 건넸다. 앤은 루루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사역당하는 자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며 장인들이 모인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엘리엇과 킬레인, 키스, 스텔라는 루루의 수명이 한두 달뿐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채 요정의 기력을 회복시킬 설탕과자를 직접 만들기로 뜻을 모으고 있었다. 앤은 그들에게 루루의 수업 재개 소식과 플라이휠 숙제를 전달했으나, 생소한 도구를 본 장인들은 그것이 어떤 힌트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날 밤 앤은 사라진 미스릴을 찾아 나섰다가 고치의 탑 근처에서 왕비의 시종인 에디를 다시 만났고, 그와 함께 요정은 왜 부려지는 존재여야 하는지, 관습이라는 이름의 굴레가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 심오한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고치의 탑 작업장에는 루루와 그녀를 곁에서 지키는 샤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루루는 은설탕을 다섯 번 이상 곱게 갈아내고 설탕사과 씨앗 기름을 묻혀 플라이휠로 가느다란 은빛 실을 뽑아내는 신비로운 기술을 선보여 장인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기술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질문만 던지는 스텔라와 장인들의 태도에 실망한 루루는 크게 분노하며 다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자리를 떠났다. 앤은 요정의 기술이 끊기지 않도록 반드시 스스로 답을 찾아내겠다며 루루의 뒷모습에 대고 결연하게 소리쳤다.
이후 다섯 명의 장인은 외부와 단절된 채 밤낮없이 은설탕 실을 잣는 연습에 매달렸고, 열흘이 지나자 실을 뽑는 기술에 어느 정도 숙달되었다. 앤은 작업대 위에 놓인 루루의 작품인 왕가 휘장을 관찰하다가 깃발이 실로 짠 천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 기술의 핵심이 실을 엮어 만드는 직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인들이 작업장에 방치되어 있던 베틀을 찾아내어 본격적인 사투를 시작하자 휴가 나타나 그들의 도전을 지켜보았고, 샤르 역시 고치의 탑 위층에서 앤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으며 루루와 함께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스무날이 흐르는 동안 샤르가 루루의 방에서 머물자 앤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된 것이라 오해하며 서글픈 마음을 다잡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마침내 앤의 방으로 돌아온 샤르는 루루와의 관계가 농담이었음을 밝히며 앤의 오해를 풀어주었고, 뺨을 어루만지며 앤에게 무언가 중대한 질문을 던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미스릴이 뛰어들어 루루의 몸이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지려 한다는 급보를 전했다.
모두가 달려간 고치의 탑에서 루루는 자신의 수명을 늘릴 유일한 방법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형태의 설탕과자를 먹는 것뿐이라며 장인들의 도움을 거절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샤르는 요정의 기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거래에 나서겠다고 결심하며 앤에게 루루의 기술을 온전히 이어받으라고 당부했다. 그때 은설탕 자작 휴와 왕비, 다우닝 백작을 거느리고 에드먼드 2세가 모습을 드러냈고, 앤은 국왕의 얼굴이 자신이 에디라고 알고 있던 시종과 동일인물임을 깨닫고 경악했다. 샤르는 왕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려 마주 섰다.
[7장 요정과 인간의 서약]
왕비와 다우닝 백작을 거느리고 위엄 있게 서 있던 사내가 에디라는 사실을 깨달은 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밤마다 성루에서 마주치던 시종 에디가 사실은 하이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먼드 2세였다는 진실은 앤에게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평소 정복을 입은 국왕의 모습과 성루 어둠 속에서 간소한 차림을 했던 사내의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기에 앤은 꿈에도 그가 동일 인물일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국왕은 놀란 앤에게 사과하며 침대 위에 누워 수명이 다해가는 은설탕 요정 루루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왕가가 오백 년간 지켜온 존재가 속절없이 사라지려는 상황에 괴로워하며 침대로 다가가려 했으나, 그 순간 앤의 호위 요정 샤르가 국왕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우닝 백작은 감히 요정이 국왕 앞을 가로막는 무례를 범한다며 고함을 쳤으나, 샤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루루의 수명을 늘릴 방법을 제시했다. 샤르는 최고의 설탕과자를 만들어 루루에게 먹이면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말하며, 그 조건으로 루루의 날개를 돌려줄 것과 은설탕 제작 기술을 인간 장인뿐만 아니라 요정들에게도 전수할 것을 요구했다. 다우닝 백작이 분노하며 샤르의 정체를 캐묻자, 샤르는 자신이 마지막 요정왕 리제르바가 다음 요정왕을 위해 준비한 흑요석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밝혔다. 또한 백 년 전 요정왕의 검을 지키던 엘리자베스 로웰, 즉 리즈가 화형에 처해졌던 진실이 사실은 태어나선 안 될 요정왕을 낳은 죄였다는 왕가의 비밀을 들추어냈다.
샤르의 정체가 드러나자 다우닝 백작은 근위병을 소집해 탑을 포위하라 명하며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샤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은설탕 요정의 죽음과 동시에 요정들을 모아 인간과 전쟁을 벌이겠노라 선포했다. 앤은 샤르가 위험에 처할까 봐 몸을 떨면서도, 기술이 유출되면 왕가의 권위가 무너질 것이라 두려워하는 다우닝 백작에게 장인으로서의 긍지를 담아 외쳤다. 기술이 퍼지더라도 최고의 설탕과자를 빚어내는 것은 결국 장인의 실력에 달린 것이니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앤의 호소는 장내를 정적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왕비의 설득과 샤르의 진심 어린 왕으로서의 맹세에 마음이 움직인 에드먼드 2세는 요정왕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근위병들을 물러나게 하며 평화로운 협상을 맺었다.
국왕 일행이 떠난 후 앤은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으나, 샤르는 앤의 용기에 고마움을 표하며 부드럽게 입을 맞추어 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곧이어 앤은 기운을 차려 루루에게 살아갈 의지를 물었고, 루루는 과거 요정왕 리제르바가 씌워주었던 '빛풀 화관'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앤은 즉시 작업실로 달려가 네 명의 장인과 합심하여 루루를 위한 설탕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섯 장인은 각자 실을 잣고 색을 조합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앤은 에마에게 받았던 끝이 굽은 도구를 사용해 은설탕 실을 코바늘뜨기처럼 엮어내는 새로운 기술로 정교한 줄기를 만들어냈다. 밤을 지새우며 완성된 빛풀 화관은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고, 이를 루루의 가슴 위에 올리자 화관은 빛의 알갱이가 되어 루루의 몸속으로 스며들며 그녀를 다시 깨어지게 했다.
루루는 기운을 차린 후 한 달 동안 장인들에게 혹독하면서도 정교한 가르침을 베풀며 그들의 실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루루는 앤을 따로 불러 '최초의 은설탕은 최초의 설탕사과 나무에서 만들어졌다'는 수수께끼 같은 비밀을 전하며 무언가 소중한 사명을 맡겼다. 앤이 루루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자, 키스가 다가와 앤에게 공방을 함께 차리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동반자가 되어달라는 진심 어린 고백을 전했다. 이를 지켜보던 샤르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앤의 대답을 재촉했으나, 앤은 키스의 고백과 샤르를 향한 자신의 연정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대답을 유보했다.
홀로 모인 장인들 앞에 다시 나타난 다우닝 백작과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는 국왕의 공식적인 명령을 전달했다. 장인들이 배운 비전 기술은 이제 해금되어 각 파벌로 돌아가 전수될 것이며, 모든 공방은 일정 수의 요정을 견습생으로 받아들여 그들에게도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또한 앤과 키스에게는 파벌에 속하지 않은 채 휴를 도와 새로운 은설탕 요정의 자질을 가진 요정을 찾아내라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다. 성 밖에서 울려 퍼지는 팡파르 소리와 함께 인간과 요정이 공존하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올랐음을 알리며, 장인들은 복잡한 기대와 불안 속에 각자의 길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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