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은설탕사로서의 의미]
홀리리프 성의 현관 홀 중앙에서 호수의 물방울 요정 미스릴 리드 포드가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기운찬 소리에 놀란 요정들이 작업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앤 할퍼드는 당황하며 그를 가로막아 서서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미스릴은 지난 두 달간 급격히 쇠약해져 어젯밤 정신을 잃기까지 했으나, 앤과 키스 파웰, 그리고 캣이 밤을 새워 만든 설탕과자 세 개를 먹고 기적처럼 기운을 차린 상태였다. 앤은 미스릴의 활기찬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이것이 설탕과자로 이어진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무거웠다.
작업 준비를 마친 키스가 다가와 미스릴의 회복을 축하해주자, 미스릴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웃으며 작업실로 뛰어 들어갔다. 앤은 밤을 새워 도와준 키스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키스는 요정들의 수련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앤의 결심을 다시 확인했다. 앤은 미스릴의 생명을 영구적으로 이을 방법을 찾기 위해 샤르의 형제석이자 비밀을 알고 있는 라팔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정들었던 공방을 떠나는 것은 아쉬웠으나 앤에게는 미스릴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간절했다. 그때 마차 준비를 마친 샤르 펜 샤르가 나타났고, 키스가 앤을 바라보는 간절한 시선을 뒤로한 채 샤르는 키스에게 돌아오면 할 말이 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앤과 함께 성을 나섰다.
루이스턴 교외의 왕실 설탕사과 숲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앤은 샤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여름 끝자락의 눈부신 햇살 속에서 샤르는 평소처럼 앤을 놀리다가, 갑자기 앤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어젯밤에 했던 고백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다. 앤은 어젯밤 샤르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일이 환각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너무나 기쁘면서도 자신이 샤르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라팔의 예언 때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앤을 보며, 샤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답을 재촉했다. 묘한 긴장감과 두근거림 속에 어느덧 마차는 은설탕 자작 휴 머큐리가 머물고 있는 오두막에 도착했다.
작업복 차림으로 설탕사과 작황을 살피던 휴는 앤의 방문을 반갑게 맞이하며 요정 육성 사업의 성과를 칭찬했다. 하지만 앤이 지금 맡은 일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폭탄선언을 하자 휴의 표정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휴는 국왕의 명을 받은 은설탕사로서의 책임을 강조하며 앤을 엄하게 꾸짖었다. 앤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은설탕사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초심을 떠올렸고, 만약 이 칭호 때문에 친구인 미스릴을 돕지 못한다면 은설탕사로서 존재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앤은 자신의 자부심이자 긍지였던 왕실 훈장을 꺼내 휴에게 반납하겠다고 선언했다.
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앤을 응시했고, 호위병 살림이 만류했음에도 앤의 결의는 꺾이지 않았다. 앤은 떨리는 손으로 휴의 손바닥 위에 훈장을 올려두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성으로 돌아온 앤의 소식을 들은 키스와 캣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캣은 은설탕사의 의미를 편협하게 해석한 휴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당장 담판을 짓겠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홀에 남겨진 키스는 앤이 미스릴을 위해 모든 명예를 포기했다는 사실에 씁쓸해하면서도 그녀다운 선택임을 인정했다. 앤이 미스릴의 상태를 확인하러 위층으로 올라가자, 샤르는 키스에게 자신이 앤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당당히 선포했다. 키스는 큰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전의를 다지며 자신도 결코 앤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맞서며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라이벌 의식이 감돌았다.
같은 시각, 길름 주의 황량한 벼랑 끝에 앉아 있던 소년 요정 에릴은 변해가는 나뭇잎의 색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말을 이끌고 나타난 라팔은 에릴에게 요정왕에게 걸맞은 장소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라팔은 자신을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던 샤르와 인간들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는 발밑의 무당벌레를 조심스레 옮기면서도, 죄가 있는 인간들과 샤르를 갈가리 찢어버리겠다는 잔혹한 다짐을 했다. 멀리 보이는 폐허가 된 성을 바라보며 라팔은 앤과 샤르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그들의 뒤틀린 여정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2장 그들이 찾는 곳]
왕도 루이스턴 서쪽 시장 구석에는 요정들이 상품처럼 팔려 나가는 거대한 요정 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설탕사 앤 할퍼드는 키스가 준 정보를 토대로 요정 상인 길드 수장인 레지널드 스토의 심복 해리스를 찾아 샤르와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시장 초입부터 새장 속의 작은 요정들과 쇠사슬에 묶인 채 텅 빈 눈으로 앉아 있는 요정 소녀의 모습이 앤의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인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억누르며 앤은 시장 중앙의 노천 술집에서 해리스를 찾아냈다. 샤르를 상품 가늠하듯 훑어보는 사내들의 불쾌한 시선을 가로막으며 앤은 해리스에게 스토를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 해리스는 넉살 좋게 웃으며 그들을 시장 뒤편 좁은 골목의 어둑하고 답답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회색 머리의 장신 레지널드 스토가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앤을 알아보고는 정보를 주는 대가로 십 크레스라는 큰돈을 요구했고, 성숙해지면 더 흥미로운 대가를 기대하겠다는 농담을 던져 샤르의 살기를 돋우기도 했다. 앤은 왕성에서 도망친 라팔과 에릴의 행방을 물었다. 레지널드는 나이프를 꺼내 지도 위에 그들의 목격 지점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나씩 찍어 내렸다. 웰놈 가도에서 시작해 노던블로와 발크람을 거쳐 마지막 나이프는 빌세스 산맥 동부에 깊숙이 박혔다. 그는 왕실에조차 넘기지 않은 정보의 패를 앤에게 넘겨주며, 그들이 도망자들을 직접 잡아 오기를 기대하는 교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앤은 지도 위에 뚫린 구멍들이 루이스턴에서 북상하다가 길름 주 근처에서 완만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좁혀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 궤적의 끝은 바로 하이랜드 왕국의 정중앙이었다.
앤은 과거 마지막 은설탕 요정 루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이랜드 한가운데에 최초의 설탕 사과나무가 있다는 그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앤은 루루를 꼭 만나야겠다고 결심하며 홀리리프 성으로 돌아와 키스에게 왕성으로 전할 편지를 부탁했다. 그날 밤, 앤이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을 무렵 루루가 직접 앤의 방으로 찾아왔다. 잠결에 깬 앤은 루루와 샤르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달빛이 부서지는 밤공기 속에서 루루는 라팔 일행을 만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그들이 요정왕임을 단번에 알아보고, 오백 년 동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첫 번째 설탕 사과나무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고 고백했다. 루루는 샤르를 리제르바의 형제로 인정하면서도, 앤이 샤르가 연모하는 사람임을 장난스럽게 폭로해 두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수명이 다해가는 루루는 사르르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앤에게 사랑을 망설이지 말라는 다정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밤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앤은 샤르, 미스릴과 함께 낡은 상자형 마차에 짐을 싣고 여정을 시작했다. 배웅하러 나온 키스와 캣, 그리고 견습생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언덕을 내려왔을 때, 길목에서 은설탕 자작 휴의 마차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앤은 어제 미스릴과 함께하기 위해 은설탕사 칭호를 포기하고 훈장을 돌려주었기에 휴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휴는 앤의 각오가 자신과는 다른 방식의 장인 정신임을 인정하며 그녀에게 왕실 훈장을 다시 내밀었다. 그는 왕국 중부의 설탕 사과 결실을 조사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앤이 은설탕사의 자격을 유지한 채 떳떳하게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살림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앤은 가슴에 훈장을 꼭 품고 미스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목적지인 길름 주를 향해 힘차게 마차를 몰았다.
[3장 과거의 성]
길름 주를 가로지르는 빌세스 산맥의 웅장한 능선을 따라 앤 일행을 태운 상자형 마차가 묵묵히 이동했다. 홀리리프 성을 떠난 지 칠 일째 되는 날, 일행은 점심 식사를 위해 물줄기가 약한 개울가 옆에 잠시 멈춰 섰다. 앤은 휴의 지시대로 여정 중에 들른 설탕 사과 숲의 상태를 꼼꼼히 기록한 종이를 살피며 올해의 풍년을 예감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라팔과 에릴을 찾아야 하는 앞날에 대한 걱정은 여전했다. 샤르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찾는 그들이 추격대에 예민해져 있을 것이라며, 마주치면 상처를 입혀서라도 붙잡아야 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샤르만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고민에 빠진 앤을 보며, 샤르는 시시한 생각을 하지 말라며 앤의 귓가에 키스하겠다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당황한 앤은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오렌지를 들고 서둘러 개울가로 피했다.
개울가에서 혼자 마음을 달래던 앤에게 미스릴이 다가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연기를 하며 앤을 놀라게 했다. 미스릴의 성화에 못 이긴 앤은 결국 며칠 전 샤르에게 연인이 되어달라는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앤은 샤르를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인간인 자신이 먼저 죽고 나면 샤르가 과거 리즈를 잃었을 때처럼 다시 불행해질까 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스릴은 좋아하는 사이에 무슨 불행이냐며 화를 내더니, 두 사람을 이어주겠다며 먹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수상한 약초를 차에 넣으려 했다. 다행히 이를 눈치챈 샤르가 제지한 덕분에 소동은 일단락되었고, 일행은 다시 북쪽 황무지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여드레째 되는 날, 일행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낡고 황량한 세인트 하이드 성에 도착했다. 그곳은 오십 년 전 예배당이 무너진 뒤 버려진 폐성이었으나, 사실 샤르가 태어나 리즈와 함께 열다섯 해를 살았던 고향이었다. 성에 서린 화재의 흔적을 보며 샤르는 리즈가 살해당하고 자신이 복수를 위해 떠돌았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렸지만, 걱정하는 앤에게 네가 곁에 있으니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성안 홀에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을 먹은 뒤, 미스릴과 앤이 잠든 사이 샤르는 홀로 성벽 위 보행로로 향했다. 잠에서 깬 앤은 작은 횃불을 들고 샤르를 찾아 계단을 올랐고, 달빛이 서늘하게 비치는 성벽 위에서 그를 만났다.
샤르는 리즈를 잃고 수십 년간 복수만을 위해 살았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이제 이 성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지지만 리즈가 자신에게 바랐던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고백했다. 리즈가 원했던 사랑이 바로 자신이 현재 앤에게 품고 있는 마음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샤르는 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물었다. 앤이 간절한 진심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찰나, 차가운 바람과 함께 라팔이 나타나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라팔은 증오가 서린 눈으로 샤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어 은빛 머리카락의 요정 에릴까지 합세하여 샤르를 압박했다. 두 형제석 요정의 맹렬한 공격에 샤르가 위험에 처할 것을 직감한 앤은 더 이상의 싸움을 막기 위해 샤르의 앞을 가로막으며 멈추라고 소리쳤다.

[4장 순수한 자와 은설탕]
앤은 샤르를 등 뒤로 감싸며 라팔과 에릴 앞에 당당히 나섰다. 그녀는 라팔에게 설탕과자를 원하는 만큼 만들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건네며 거래를 시도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설탕과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에릴과 달리, 빈사 상태에서 회복 중인 라팔에게는 그 힘이 절실할 것임을 꿰뚫어 본 판단이었다. 샤르는 위험한 거래라며 앤을 만류했지만, 앤은 미스릴 리드 포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강점인 은설탕사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앤의 결연한 모습에 라팔은 묘한 흥미를 보이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들에게 봉사한다는 조건으로 목숨을 이은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양측이 검을 거두며 일시적인 휴전이 성립되자, 긴장이 풀린 앤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샤르는 그런 앤을 안아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옮겨주며 안심시켰다.
다음 날 아침, 앤은 자신의 뺨을 감싸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에릴 때문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에릴은 앤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며 천진난만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겼고, 이를 발견한 샤르가 화를 내며 그를 떼어놓았다. 곧이어 나타난 라팔은 앤이 에릴의 손을 잡으려 하자 즉각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며 인간이 에릴에게 손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라팔은 에릴이 인간에게 사역당해 날개를 잃지 않은, 유일하게 완전하고 순수한 요정왕이라며 각별한 집착을 보였다. 한편 이 대화를 엿들은 미스릴은 라팔이 언급한 세 명의 요정왕 중 마지막 한 명이 자신이라고 오해하며 난데없는 자신감을 얻었고, 샤르는 미스릴이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 이용하기로 했다.
일행은 라팔과 에릴이 구해온 군용마들과 앤의 마차를 이끌고 빌세스 산맥을 향해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샤르는 백 년 전의 흔적이 사라진 성을 뒤로하며 곁에 있는 앤과의 현재를 소중히 여기기로 다짐했다. 이동 중 앤은 라팔 일행이 가진 지도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신이 가진 정식 지도를 건네며 길을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설탕과자에 호기심을 느낀 에릴이 앤의 마차 작업장에 발을 들였다. 에릴은 앤이 건넨 은설탕을 맛보고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달콤함에 황홀해하며 앤에게 매달려 설탕과자를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에릴은 라팔과 달리 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고, 친구의 증표라며 앤의 손을 맞잡거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앤은 에릴의 순수한 모습에 잠시 마음을 놓으면서도, 라팔이 숨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그가 거부하지 못할 결정적인 수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다시 말에 올라탄 에릴은 은설탕의 여운을 즐기며 기뻐했지만, 이내 라팔이 설탕과자에 집착하는 이유가 자신이 저지른 어떤 일 때문임을 암시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5장 대관식]
라팔은 앤이 건넨 지도를 따라 왕국의 중심부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세인트하이드 성에서 곧장 북쪽으로 향하던 진로는 이내 서쪽으로 꺾였고, 일행은 큰길을 벗어나 황무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빌세스 산맥의 자잘한 바위 봉우리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지형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고도는 점점 높아졌으며, 거칠고 마른 흙 위로 부는 바람은 초가을의 햇빛을 가릴 만큼 뽀얀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황량한 풍경은 마치 블러디 가도를 연상시켰으나, 완만한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지는 점이 달랐다.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정면에서 주홍빛 광선을 쏟아내자 앞서 걷는 라팔과 에릴의 그림자가 등 뒤로 길게 뻗어 나갔다. 이윽고 일행은 성긴 숲 하나를 발견하고 그 안으로 말을 몰아 밤을 보낼 준비를 시작했다. 샤르가 상자 마차를 숲속 깊이 밀어 넣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싱그러운 풀 향기가 감돌았다.
앤이 저녁 식사를 위해 마부석 아래에서 식기를 내리는 동안 샤르와 미스릴은 땔감을 구하러 숲속을 누볐다. 라팔과 에릴은 앤의 일행과 거리를 둔 채 말에서 내렸고, 지친 기색의 에릴은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태양이 산맥 너머로 사라지며 주변이 희미한 먹색으로 물들어갈 무렵, 말을 나무에 매어둔 라팔이 미소를 지으며 앤에게 다가왔다. 그는 우아하면서도 혐오스러운 미소를 띠며 앤에게 오늘 밤 안으로 자신이 만족할 만한 설탕과자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저녁 식사부터 준비하려던 앤의 팔을 거칠게 낚아챈 라팔은 식기를 바닥에 흩뜨리며 그녀를 노예라 칭했다. 그는 앤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는 이곳이 요정의 세계임을 강조하며 인간인 그녀가 자신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속삭였다. 라팔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순종하라며 협박했고, 앤은 분노를 삭이며 고개를 숙였다. 라팔의 증오 섞인 조롱이 이어지던 중 그의 입술이 앤의 뺨에 닿았고, 놀란 앤이 저항하려던 찰나 낮고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샤르가 나타나 라팔의 목에 백은의 칼날을 겨누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샤르의 눈동자와 라팔의 여유로운 웃음이 교차하는 사이, 은빛 머리카락을 흔들며 다가온 에릴이 살기를 뿜어내며 샤르를 가로막았다. 에릴은 라팔을 건드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며 검을 거두라고 소리쳤고, 상황이 험악해지자 앤은 샤르의 어깨에 매달려 그를 진정시켰다. 샤르가 검을 거두자 에릴은 라팔을 보호하듯 곁으로 이끌었고, 앤은 라팔이 샤르와 에릴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했음을 깨달았다. 소동이 가라앉은 후 앤은 미스릴에게 저녁 준비를 부탁하고 곧바로 설탕과자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마차로 향했다. 기운이 약해져 날개가 얇아진 미스릴을 보며 앤은 서둘러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때 샤르가 앤의 손목을 잡아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고, 라팔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 흔적을 지워주었다. 정화되는 기분을 느끼며 짐칸으로 들어간 앤은 비장한 마음으로 은설탕 통을 열었다.
앤은 미스릴을 위한 설탕과자로 화려한 왕관을 구상했다. 그녀는 은설탕 실을 정교하게 잣고 소형 직기를 이용해 백은처럼 빛나는 바탕을 짰다. 이어 온갖 색가루를 섞어 반짝이는 보석 알갱이들을 만들어 왕관 위에 배치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완성된 작은 왕관을 본 앤은 오랜만에 창작의 기쁨을 느꼈다. 짐칸으로 들어온 미스릴에게 앤은 장난스럽게 대관식을 거행하며 왕관을 씌워주었으나, 크기 조절 실패로 왕관이 미스릴의 몸을 푹 덮어버리자 샤르는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미스릴은 기쁘게 왕관을 받아먹었고, 설탕과자의 힘으로 그의 날개에는 다시 금빛 생기가 돌았다. 잠시 후 에릴이 찾아와 라팔을 위한 설탕과자를 재촉하자 앤은 그를 안으로 들여 라팔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에릴은 라팔이 무당벌레를 좋아한다고 답하며 앤의 옆에서 은설탕 반죽을 돕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분위기도 잠시, 주먹만 한 강철 화살촉이 마차 벽을 관통하며 들이닥쳤다. 국왕의 명령을 받은 주병들의 습격이었다. 샤르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거세게 요동치며 달리기 시작하자 앤은 설탕과자를 지키기 위해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라팔이 붙잡히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에릴은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빛의 검을 형상화했고, 샤르 역시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마부석에서 내려와 전투에 가담했다. 어둠 속에서 펼쳐진 난전 속에서 샤르는 주병들을 죽이지 않으면서도 무력화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샤르는 어깨에 굵은 화살을 맞는 중상을 입었지만, 이를 악물고 화살을 뽑아낸 뒤 남은 주병들을 차례로 제압했다. 습격이 일단락되자 샤르는 다시 마부석에 올라 채찍을 휘둘렀고, 함부로 싸우려 했던 에릴의 뺨을 후려치며 자중할 것을 경고했다. 어둠을 가르며 다시 질주하는 마차 안에서 에릴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샤르가 보여준 행동의 의미와 그가 품은 진심에 대해 처음으로 깊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6장 앤의 왕]
샤르는 주 방위군과 맞서면서도 살생을 금하며 그들을 묶어두는 데만 집중했다. 앤은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샤르가 이끄는 마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 불안에 떨었다. 샤르는 추격대를 따돌리기 위해 어둠 속에서도 단호하게 마차를 몰았고, 마차 안에서 설탕과자를 품에 안은 앤은 덜컹이는 진동과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긴 밤을 견뎠다. 마침내 날이 밝아오자 마차는 속도를 줄여 드넓은 초원 한복판에 멈춰 섰다. 앤이 짐칸에서 내려 확인한 곳은 깎아지른 절벽이 치솟은 빌세스 산맥의 깊은 안쪽이었다.
마부석으로 다가간 앤은 고삐를 쥔 채 축 늘어져 있는 샤르를 발견했다. 그의 어깨에서는 상처가 아물며 튀어 오른 빛의 가루가 반짝이고 있었다. 부상이 깊다는 것을 알아챈 앤은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샤르를 회복시키기 위해 짐칸에서 설탕과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타난 라팔이 앤의 팔을 거칠게 낚아채 설탕과자를 빼앗아 버렸다. 라팔은 그것을 가루처럼 만들어 자신의 힘으로 흡수하며 수고했다고 비웃었고, 앤은 허망하게 사라진 과자를 보며 무력감에 휩싸여 주저앉았다.
이때 미스릴이 나서서 라팔을 가로막으며 자신은 앤과 샤르를 지키는 왕이라고 소리쳤다. 라팔은 하찮은 요정의 선언을 비웃었지만, 미스릴은 앤이 준 왕관이 제 마음속에 있다며 당당하게 맞섰다. 앤은 두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미스릴을 끌어안으며 그의 강한 긍지를 확인했다. 앤은 슬픔을 가라앉히고 라팔에게 지도를 요구했다. 여행의 경험이 풍부했던 앤은 해의 위치와 지형을 대조해 현재 위치가 왕국의 중심에 아주 가깝다는 것을 파악했다. 앤은 직접 고삐를 잡고 마차를 몰기 시작했고, 의식을 회복했다가 다시 지쳐 잠든 샤르가 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앤은 그 온기를 느끼며 길도 없는 숲과 바위 지대를 헤쳐 나갔다.
누군가 닦아놓은 듯한 묘한 길을 따라 고도를 높이자 공기는 점차 습해졌고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마침내 그들 앞에는 은회색 줄기가 눈부시게 반짝이는 설탕 사과 숲이 나타났다. 오백 년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는 전설의 장소에 도착했다는 기쁨도 잠시, 앤은 나무에 묶인 머큐리 공방의 리본을 발견하고 당혹감에 빠졌다. 이곳은 사실 매년 누군가 수확하러 오는 장소였던 것이다. 라팔은 인간의 흔적에 분노하며 나뭇가지를 꺾었지만, 샤르는 이곳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며 상황을 냉정하게 짚어냈다.
밤이 깊어지자 앤은 추위를 견디며 짐칸에서 몰래 샤르를 위한 설탕과자를 만들었다. 라팔과 에릴이 잠든 사이, 앤은 검은 나비가 앉은 붉은 열매 모양의 작은 과자를 들고 샤르에게 다가갔다. 샤르는 앤이 내민 과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달빛 아래서 금빛 가루가 두 사람의 손가락 사이로 아름답게 흘러내렸고, 샤르는 그 달콤한 힘을 받아들이며 앤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그 형상 속에서 발견했다.
[7장 운명에 맞서는 비장의 패]
손바닥을 짓누르던 설탕과자의 무게가 사라지자 앤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던 금빛 기운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샤르는 황홀경에 빠진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멍하니 서 있다가 앤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양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의 감촉과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위로 쏟아지는 감각에 앤은 오싹한 떨림을 느꼈다. 샤르는 달콤한 향이 난다는 말을 남긴 채 손을 놓았고 앤은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라팔을 위한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연못가에서 망을 보던 미스릴 리드 포드를 데리러 간 앤은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날개가 얼음장처럼 차갑고 눈에 띄게 얇아진 것을 발견했다. 설탕과자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앤은 미스릴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이곳에서 첫 설탕 사과나무를 찾아 라팔과 거래할 비장의 패를 쥐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밤 설탕 사과나무 아래 누워 있던 에릴은 과거를 회상했다. 태어난 순간 마주한 형제석 요정 라팔은 인간에게 쫓겨 소멸해가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에릴은 그를 외면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함께해 왔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에릴은 연못가에서 미스릴과 대화하는 앤에게 다가가 자신에게도 설탕과자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다. 라팔의 것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앤의 말에 기분이 상한 에릴은 샤르와 미스릴을 모욕하며 잔인한 말을 내뱉었고 이에 분노한 앤은 에릴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앤은 누구를 위해 과자를 만들지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며 죽어가는 미스릴을 모욕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일갈했다. 에릴은 앤과 샤르가 자신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말하는 공통점에 놀라며 자신의 삶을 지탱해 온 안개가 걷히고 미래라는 낯선 감각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처음으로 라팔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미스릴과 앤의 마음을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숲에 도착한 지 8일째가 되자 설탕 사과 열매가 붉게 익어가며 가을이 깊어졌다. 미스릴은 이제 눈에 띄게 쇠약해져 날개 끝이 공기 중으로 스며들 듯 희미해졌고 앤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첫 설탕 사과나무를 찾는 데 매달렸다. 샤르 역시 미스릴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숲을 샅샅이 뒤졌으나 성과가 없던 중 주 병사들의 수색대가 숲 경계에 나타났다. 추격대를 따돌려 시간을 벌기 위해 샤르는 말에 올라타 앤에게 해가 지기 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숲을 가로질러 달려 나갔다. 홀로 남은 앤은 작업대 위에 쓰러진 미스릴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미스릴은 꺼져가는 숨결 속에서도 앤에게 샤르를 향한 진심을 고백하라고 격려했고 앤은 그를 살리기 위해 루루가 남긴 수수께끼인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장소의 의미를 필사적으로 추적했다.
연못가에 다다른 앤은 맑은 수면을 바라보다가 실제 땅 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물속에만 선명하게 비치는 거대한 설탕 사과나무의 환영을 발견했다. 루루가 말한 최초의 설탕 사과나무가 바로 물 위의 반영 속에 숨겨져 있음을 깨달은 앤은 이것이 운명을 뒤바꿀 비장의 패임을 확신했다. 앤은 곧장 라팔과 에릴을 불러 장소를 알려주는 대가로 비밀을 요구했다. 에릴은 앤의 절실한 외침에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숨겨진 능력인 생명을 치유하는 힘을 드러냈다. 에릴이 손바닥에서 뿜어낸 은빛 안개가 미스릴의 몸을 감싸 안았고 부서져 가던 미스릴의 생명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으나 그 대가로 미스릴은 선천적인 능력을 잃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약속대로 앤이 연못의 반영을 가리키며 최초의 설탕 사과나무가 있는 위치와 진입 방법을 설명하자 라팔은 비로소 요정왕의 왕국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에릴을 먼저 보낸 라팔은 돌연 검을 뽑아 앤의 복부를 깊숙이 찔렀다. 앤은 뜨거운 통증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고 라팔은 유일하게 장소를 아는 장인을 제거함으로써 샤르에게 고통을 주겠다는 잔인한 속삭임을 남긴 채 사라졌다.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이끌고 신음하던 앤의 곁으로 약속대로 샤르가 돌아왔다. 피로 물든 앤을 발견한 샤르는 절규하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앤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샤르의 입술을 느끼며 마지막 힘을 다해 오랫동안 전하지 못했던 사랑의 고백을 내뱉었고 연인이 되어달라는 애절한 요청과 함께 차가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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